1946년 2월 15일, 최초의 전자 컴퓨터 ‘에니악’을 대중에게 공개했을 때, 시연의 하이라이트는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연 결과 에니악은 불과 20초 만에 궤도를 계산하며 대성공을 이뤘고, 해당 내용은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이 포탄 궤적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두 명의 여성 프로그래머였으나, 이들의 존재는 신문에서도 역사에서도 지워지고 만다.
신간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은 컴퓨터, 인터넷 역사에 공헌했음에도 잊혀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프로그래머, 과학자, 사업가 등 기술 발전의 중요한 물결마다 등장한 여성들을 조명해 비록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저자인 클레어 L. 에반스는 문화 잡지 ‘바이스(VICE)’의 과학기술 전문 채널 ‘마더보드(Motherboard)’ 전 편집자이자 SF 섹션 ‘테라폼(Terraform)’ 창립 편집자로, 과학·기술·문화·여성에 관한 글을 써왔다. 국내외 우수 여성 과학자를 소개하는 도서를 출간해온 한국여성과총 출판위원회의 기획을 통해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은 인터넷의 역사를 따라가며 각 발전 단계마다 여성들이 기여한 주요 내용들을 소개한다.
먼저 1부는 컴퓨터의 발전을 주도한 여성 ‘인간 컴퓨터’에 대해 다룬다. 오늘날 기계 자체를 뜻하는 단어인 ‘컴퓨터’는 19세기 처음 등장한 이후 200년 가까이 ‘생계를 위해 계산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인간 컴퓨터들은 집단으로 대규모 계산을 수행하며 천체의 목록을 작성하고 세계의 지리를 측정하고 폭탄을 제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단순 계산에서 그치지 않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작성하는 등 한 단계 더 나아간다.
2부는 컴퓨터와 컴퓨터, 여성과 여성, 정보와 정보를 연결한 초기 정보화 시대 여성들의 업적을 조명한다. 특히 동굴 탐험가이자 프로그래머였던 ‘퍼트리샤 크라우더’가 서로 다른 동굴을 연결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동굴 지도를 남긴 사례에 주목한다. 또한 컴퓨터를 사용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층을 사회복지기관과 이어준 샌프란시스코 히피 여성들의 사례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개별 컴퓨터를 연결해 그 기계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도운 일들에 주목한다.
3부에서는 인터넷의 힘을 활용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여성 예술가, 사업가, 게임 디자이너 등의 이야기를 다뤘다. 처음으로 전자 잡지를 발간한 사업가, 최초의 여성 미디어 기업 ‘WOMEN.COM’을 만든 기업가, 인터넷 공간에서 여성해방을 외친 사이버 페미니스트 예술가 등의 사연을 풀어냈다.
책은 “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거기 없었다는 뜻은 아니”라며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또한 “기록 매체의 저장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나아가 여전히 여성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의 수가 부족한 오늘날, 책에 등장하는 여성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술을 가진 여성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은 믿음도 함께 전달한다.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클레어 L. 에반스 지음, 조은영 옮김. 해나무 펴냄. 464쪽/ 1만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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