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이젠 쉽고 재미나게 배워요

[이로운 기술 ① ]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 점자 학습기 '탭틸로(Taptilo)'

[편집자 주] 기술에는 두 얼굴이 존재한다. 전쟁과 실업·불평등을 낳는 어두운 얼굴과 불편함과 질병·장애를 이겨내는 고마운 얼굴이다. 고마운 얼굴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사람을 향한 이로운 기술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회혁신기업들의 이야기를 이로운넷이 전한다.
 

한 어린이가 스마트 점자학습기 'Taptilo'로 놀이하듯 점자를 익히고 있다.

2017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 최대 보조공학 박람회장(CSUN), 한 남성이 김항석 오파테크 이사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탄성을 자아냈다.

“왜 이제야 이런 걸 개발했느냐. 우리 아이에게 점자를 가르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안타까움과 고마움이 동시에 일렁이는 반응이었다. ‘이런 걸’ 이란 스마트 점자 학습기 ‘탭틸로(Taptilo)’를 말한다. 탭틸로는 모바일 앱과 연결해 점자를 외우고 쓰는 방법을 익히는 스마트 점자학습기이다.

 

 

Taptilo의 위칸은 블록으로 점형을 익히고(쓰기) 아래칸은 스크린으로 (읽기) 학습의 기능을 한다.

 

 

 

요즘은 엘리베이터나 공공시설에서 점자 표기를 쉽게 볼 수 있지만 모든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점자를 배우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점형(철자)을 익히고 촉지(손가락 감각)로 문장을 읽으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이 필요하다.
 

점자로 쓰여진 책

교육과 생활에 필요한 필수 단어 200개를 익히는 데 평균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 전 세계 약 2억 5300만 명의 시각장애인 중 5.2%만이 점자를 읽을 수 있다(WHO 2014) . 개발도상국의 경우 더 심각해 3%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글씨가 보이지 않아 점자를 배워야하는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비율은 27.1% 수준이다.

 

“시각장애인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 상당수가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점자를 배우려고 합니다. 교육 시설도 부족하고 이동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배우기도 가르치기도 힘든 게 현실입니다.”

-- (이경황 오파테크 대표)

 

 

점자 학습은 일반적으로 먼저 점형(6개 점으로 표현되는 철자)을 외우고 촉지 감각(점자의 오르내림)을 익히는 순으로 진행된다.
 

'Taptilo'는 철자를 익히는 점형의 크기가 커서 초보자가 배우기에 안성마춤이다.

탭틸로는 그 첫 단계인 점형 외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종의 단어를 쓰고 읽을 줄 아는 단어 암기장과 같은 역할이다.  이 대표는 "단어를 익히되 종전의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IoT 기술을 접목해 게임이나 퀴즈를 섞어 흥미와 재미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 실제 점자의 크기는 아주 작습니다. 처음부터 작은 크기로 점형을 익히는 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탭틸로가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이 기기의 장점은 확장성이다. 인터넷을 통해 기존에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걸 할 수 있다. 단어 뿐 아니라 숫자 표기도 가능해 간단한 수준의 덧셈과 뺄셈을 익힐 수 있다. 음악 교육도 가능하다.

 

 

 

 

 

“ 블록에 담긴 6개의 점 중 4개는 계이름을, 2개는 박자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악보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런 마디를 여러 개 저장하면 하나의 곡도 완성할 수 있지요.”

오파테크는 요즘 미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악교육 콘텐츠 개발자로 유명한 댄싱닷(Dancing dots)의 빌 매캔(Bill MaCann)대표와 함께 교육 콘텐츠를 개발 중이다. 시각장애인이기도 한 빌 매켄대표는 탭틸로가 음악을 배우려는 초보자 단계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수 있다고 평가했다.

 

 

 

빌 매캔(Bill MaCann) 댄싱닷 대표와 이경황 오파테크 대표(중앙)

 

 

 

점자 학습의 걸림돌은 ‘어렵다’ 뿐 아니라 ‘교사 부족’이 문제다. 점자의 특성상 1 대 1 교육만 가능하고 교사가 점자를 알아야만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점자는 배우기 힘들고 단기간에 교육 자격증 취득이 어려워 전 세계적으로 점자 교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탭틸로는 와이파이 환경에서 앱을 사용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진도율을 체크하고 1명의 교사가 여러 명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다. 심지어는 점자를 몰라도 가르칠 수 있다. 앱의 메뉴에다 단어를 입력하면 점자 표기법을 알려줘 비전문가도 오답을 찾아낼 수 있다.
 

스마트폰 앱을 켜고 단어를 치면 점자가 동시에 표기된다.

스스로 예습이나 복습도 가능하다. 어플과 블루투스를 연결해 점자블록으로 점자를 입력한 후 완료 버튼을 누르면 정답 여부를 알려준다.
 

오답확인 기능이 있어 예습과 복습이 가능하다.

문제는 높은 가격. 900달러에 판매돼 한화 약 100만 원 선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미국에선 약 15개 학교에서 방문교사들이 관심을 갖고 쓰기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교육청 특수교육담당자가 관심을 보여 교육청 차원에서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탭틸로는 2017년 미국 시장을 겨냥해 처음 출시됐고 올해 한글판에 이어 일본어와 스페인어 버전도 잇달아 출시될 전망이다.

 

오파테크는 기술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소셜벤처다. 2013년 설립됐다. 이경황 오파테크 대표는 창업하기 전 10년 동안 최첨단 신기술 분야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 밤샘 일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떤 기술은 1억 명이 넘는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기술은 소수의 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개발한 기술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표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적정기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망했다. 그 이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뜻이 맞는 다른 소셜벤처팀원들과 힘을 합쳐 지금의 오파테크를 창업했다.

기술로 무장한 그들은  시각장애인들의 노트북이라 불리는 점자단말기용 액추에이터(actuator⋅작동기)기술을 눈여겨봤다.

 

“점자단말기용 액추에이터 기술은 30년 전에 개발된 후 정체된 상태였어요. 저희가 특허 출원한 마이크로캠액추에이터(Micro CAM Actuator)는 그 기술을 개선한 내용입니다.”

이 기술은 작동 시에만 전력을 소모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배터리를 이용해 구동이 가능하다. 두께도 최소화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얇다. 저가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이 기술을 발전시키면 한 대당 400만 원 ~ 500만 원에 이르는 점자단말기의 가격을 낮출 뿐 아니라 그래프나 도형 등도 기기로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릴 전망이다.

오파테크는 지난 2015년 정부가 뽑은 한국 300대 대표 벤처 기업인 K-Global 300으로 선정됐고 삼성벤처투자와 임펙트스퀘어로부터 투자유치에 성공해 혁신성을 인정받았다.

 

 

 

 

시각장애인들은 노트북 형식의 점자정보 단말기를 활용하면 볼 수는 없어도 IT 세상을 누릴 수 있다. 웹서핑도 하고 문서도 작성하고 이멜도 보낸다.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취업률이 2배나 올라간다.

 

 

 

2017년 미국 보조공학 박람회장

시각장애인들에게 취업이란 단순히 소득을 얻는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소통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삶의 질을 변화시켜 나가는 창구이다.

 

 

 

“ 제가 아는 분 중에는 앞이 안 보이지만 프로그래밍을 하는 분도 있어요. 점자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건 삶의 질에 큰 차이가 납니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그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집니다.”

그의 시선은 늘 기술이 어떻게 소외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에 머물러있다.

 

 

“제가 박람회장에서나 외국에서 만나 본 시각 장애인분들은 움추려들지 않고 자신감 넘치고 쾌활합니다. 농담도 잘합니다. 이동하는데 불편함도 적고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소셜벤처들이 같이 힘을 모으면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오파테크: facebook.com/ohfatech

텝틸로(Taptilo): taptilo.com

 

글. 백선기 이로운넷책임에디터

사진제공. 오파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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