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축제에 가면 볼 수 있는 무지개 깃발. 42년 전 1978년 6월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축제에 처음 나타난 상징이다, 예술가이자 성적소수자 활동가인 길버트 베이커(1951~2017)가 창시했다.

2017년 사망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영문 서체 ‘길버트체(Gilbert Typeface)’가 만들어졌다. 길버트체는 무지개색에서 영감을 받은 색깔 서체다. 6개의 색으로 각 획을 만들었고, 겹친 부분에는 새로운 색상이 나타난다.

길버트체 탄생 3년 만에 한글판 ‘길벗체’가 탄생했다. ‘길벗체’라는 이름에는 길버트 베이커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여정(길)을 함께하는 ‘벗’의 의미를 담는다. ‘숲’과 ‘제람’을 비롯한 디자이너 7명은 사단법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을 통해 서체 개발 펀딩을 진행했다. 총 474명(단체 포함)의 후원을 받아 지난 20일 무료 배포를 시작했다.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왼쪽 위는 2017년 만들어진 길버트체, 나머지는 한국에서 출시되는 길벗체다.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왼쪽 위는 2017년 만들어진 길버트체, 나머지는 한국에서 출시되는 길벗체다.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서체로 세우는 성소수자 자긍심

서체 개발 공동책임자이자 총괄 책임자 제람(본명 강영훈)은 16일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길벗체는 최초로 전면 색상을 적용한 완성형 한글 서체”라며 완벽한 서체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과 밤새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원도를 그리고 ‘씨앗 글자’가 완성되면 서체 개발 프로그램으로 세부 작업을 거쳐 하나하나 색을 넣었다. 그렇게 3,000자를 만들었다.

우리말 자음과 모음 개수는 40개인데, 3,000자라니? 제람은 “같은 자음이나 모음도 초성인지, 중성인지, 종성인지에 따라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어는 알파벳 철자를 하나씩 옆으로 나열하는 반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한데 모아 쓴다. 시각적으로 균형감 있으려면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 순으로 최소 3,000자 정도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대·소문자와 문장 기호, 숫자 등을 포함해 100자 정도만 만들어두면 되는 영문 서체보다 품이 많이 든다. 길벗체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온 서체라는 점에서 ‘완성형’이다.

글자 모양 갖추기만큼 색상을 입히는 것도 일이다. 무지개의 6색(남색은 파랑으로 통합) 글자마다 색상 조합이 다르다. 잘 들여다보면 획이 겹치는 부분은 다른 색이다. 제람은 “한글 색상 서체가 출시된 적이 있지만, 읽고 쓰기 편한 완성형 서체이면서 글자 전체에 색을 적용한 사례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트랜스젠더(하늘색·분홍색)와 바이섹슈얼(분홍색·파란색·보라색)의 상징색을 적용한 길벗체도 함께 출시했다. 비온뒤무지개재단 측은 “길벗체는 최초의 전면 색상 적용 완성형 한글 서체로서 성적소수자 자긍심의 상징을 한글 서체의 역사에 기록할 것”이라고 전했다.

(왼쪽부터) 길벗체 제작 공동책임자 숲과 제람. 사진=제람
(왼쪽부터) 길벗체 제작 공동책임자 숲과 제람. 사진=제람

전시 전용 서체가 무료 배포되기까지

길벗체 이야기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제람은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년간 한국에서 성소수자가 종교적인 이유로 혐오와 차별을 경험한 사례를 보도한 기사를 모았다. 원래는 연구 보고서로 결과물을 내려 했는데, 전시 형태로 하는 게 더 효과가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올해 1월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Pride Over Prejudice)’ 전시를 열었어요. 서체 디자이너 숲,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라시드와 함께요. 재단에서 연구 전시 프로젝트를 해본 선례가 없어 거절할 줄 알았는데, 전폭적으로 지지해줬죠. 홍보 비용은 거의 없었는데, 5일 동안 400명 가까이 찾아왔어요. ”

이들은 기사를 퀴어문화축제, 차별금지법 등 주제별로 분류하고 관객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전시했다. 전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내용을 전달하려고 만든 게 길벗체다. 전시에 필요한 100글자 정도만 만들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서체로 출시해보자고 마음먹은 계기다.

1월 전시에 활용된 길벳체.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1월 전시에 활용된 길벳체.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서체 반응이 좋아 만들어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재단 측에서 그러더라고요. ‘너무 소중한 작업인데, 예술인들의 노동력만 갈아 넣기보다는 배려받으면서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설립 때 빼고는 자체적인 모금을 진행한 적이 없던 걸로 알아요. 그런데 이번 서체 작업을 위해서 모금 프로젝트를 해줬어요.”

300만원은 재단이 착수금으로 지원했고, 초기 목표 금액은 개발에 필요한 프로그램 구매비와 개발자 인건비 약 1,200만원. 후원자들이 요청하는 글자를 길벗체로 만들어 이미지 파일(jpg, ai, png)로 보내주는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지난 6월 29일 시작 후, 2달 반 만에 474명이 후원하고 개발비 약 2,700만원이 모였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10명의 국회의원, 임현주 아나운서, 가수 요조, 정치하는엄마들 등 정치인·유명인·단체 참여도 이어졌다. 참여자들의 이름·단체명은 공동제작자로 기록됐다.

여러 유명인과 단체 등이 SNS에 길벗체 이미지를 공유했다.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여러 유명인과 단체 등이 SNS에 길벗체 이미지를 공유했다. 사진=비온뒤무지개재단

“시각 예술로 소수자·약자 이야기 조명하고 싶어”

제람은 '작은 목소리에 큰 힘을 부여하는(small voice with a big impact)' 작업을 지향한다. 그는 제대 후 영국에서 4년 동안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며 ‘사회 일원’으로서의 작가 활동에 눈떴다. 작년 말 한국에 들어와 지금은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시각예술활동가이자 연구자, 교육자로 활동한다. 한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제람’은 ‘제주 사람’을 줄인 예명이다.

그동안 청소 노동자, 성소수자 군인, 난민 등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했다. 그는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에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시작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제람은 올해 성소수자 군인 이야기를 다룬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사진=제람
제람은 올해 성소수자 군인 이야기를 다룬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사진=제람

“앞으로도 소수자, 약자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꾸준히 용기 있게 하면 안전해져요. 시각 예술로 담론을 퍼트리고, 소수자, 약자들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 거예요. 주변에 저를 지지해주는 친구, 가족들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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