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여성 문제를 해결할 핵심 주체가 <사회적경제>



지난 8월 런던에 갔을 때 여느 관광객처럼 갤러리 투어에 나섰다. 고흐와 르누아르와 세잔의 그림을 미술책이 아닌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세상에나, 그것도 국립 갤러리의 입장료가 무료라니(물론 기부를 기다린다는 아크릴 상자가 곳곳에 있었지만). 감격의 연속이었다.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코톨드 갤러리를 꼼꼼히 돌아보고 감동에 젖어서는 마지막 목적지인 테이트 모던에 갔던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5초 정도 멍한 상태가 되었었다. ‘왜 여성 작가의 작품은 보이질 않지?’

20세기 작품관에 들어서야 영국의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의 모임인 ‘블룸즈버리 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화가 ‘바네사 벨’(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이기도 하다)의 작품들을 겨우 찾아볼 수 있었다.
“여성작가 작품은 5%, 누드의 85%는 여성의 몸”
팝아트 작품이 전시된 관을 나서다 고릴라 탈을 뒤집어쓴 사람과 굵은 글씨로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정치, 예술, 영화(미디어), 현대 문화 전반의 성차별·인종문제를 고발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전시하고 퍼포먼스, 캠페인 등의 형태로 제시하는 ‘게릴라걸스(The Guerrilla Girls)’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었다.

1985년 뉴욕 MOMA의 확장 기념 전시에 초대된 17개국 165명의 예술가 중에서 여성은 단 13명이었다. 이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포스터를 뉴욕 시내에 붙이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한 게릴라걸스는 뉴욕의 유명 갤러리에 전시된 모든 작품의 5%만이 여성 작가의 것인데 반해 누드 작품의 85%는 여성의 몸을 다뤘다는 것에 주목했다. 데이터와 통계를 통해 기존 예술계를 유쾌하게 비꼰 것이다.

ⓒ Guerrilla Girls https://www.guerrillagirls.com
나는 런던에서 게릴라걸스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사회적경제 섹터를 떠올렸다. 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소셜벤처를 창업한다고 했을까. 그건 피부로 느껴지는 여성 리더의 부재 때문이었다.

2015년 위즈돔이라는 소셜벤처의 공동대표가 되었을 때 주위를 둘러보며 여성 리더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참 이상한 게, 일하는 여성은 많은데 여성 리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사실, 일하는 여성도 또래는 많았지만 선배, 특히 기혼 여성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7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은 총 406명으로 전체 임원 수의 2.7%에 불과하다. 여성 임원이 1명도 없는 기업이 336개사로 70%에 육박한다. 이런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기업들은 여성 임원 후보 풀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제 여성 임원 양성 및 양적 증대를 위한 실질적 노력은 요원하다.

혹자는 여성 임원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며, 200만 명의 경력단절 여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일터에서 성 불평등(유리천장, 성별 임금 격차, 경력단절 등)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재 일하는 기혼여성 중 절반이 경력단절을 경험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0대에 가장 적었다가 30대, 40대로 갈수록 점점 커진다. 한국의 남녀 임금 차이는 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인 약 37%이다.

창업한다고 상황이 다를까? 플래텀에 따르면 2016년에 투자를 유치한 여성 창업 기업은 총 16개사로 전체 기업 수의 6.5%에 불과하다. 또 투자 규모는 450억 원으로 전체 규모 대비 4.1%의 액수다. 투자 유치 금액은 전체 평균이 54.7억원인 반면, 여성 창업 기업은 30억 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희망적이라면 전년 대비 0.8% 상승했다는 정도이다.
경력단절이 아닌 ‘경력보유’ 여성
이 글을 통해 불평을 늘어놓으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사실들을 언급한 것은 사회적경제야 말로 경력단절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핵심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경력단절여성이 재취업을 고려하는 주요 기준으로 적정한 수입, 적성과 능력, 일·가정 양립 가능 여건 등을 꼽는다.

즉,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여성에게 제시한다면 고급 인력을 확보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전 경력과 사회 경험을 이어갈 기회만 제공된다면 경력단절 여성이 아닌, 경력보유 여성으로서 조직이 전문성과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여성이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의 근로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시간선택제, 탄력근무제와 같은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면 경력보유 여성을 채용할 때 유연근무제를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도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둘째, 여성 인재 양성과 커뮤니티 확립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리더가 나서서 여성 관리자, 임원 비율 목표치를 설정하고 핵심 업무를 제안하면서 여성을 조직의 핵심 인재로 키워야 한다. 여성들이 연대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즐겼으면 한다. 젠더 다양성 문제를 어려운 숙제로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 불평등을 해소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배우며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게릴라걸스처럼. 그러려면 무엇부터 함께 해볼 수 있을까?

글. 김미진(WECONNEC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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