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유난히 따뜻했던 지난 3월 28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주변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른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과 봄볕을 만끽하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 주변을 걷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밝고 경쾌한 클래식 선율이었다. 2시간가량 이어진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무조건 무조건이야~”이란 가사로 익히 잘 아는 트로트가 연주돼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이날 정동제일교회 일대에 울려 퍼진 선율은 한빛예술단의 브라스앙상블의 작품이었다. 이들의 연주가 유독 더 특별하게 들렸던 것은 완연했던 봄기운 탓도 있지만 연주자 전원이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연주회가 끝나고 한빛예술단에 대해 듣기 위해 정동교회 안에서 천성애 한빛예술단 사무국장과의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시각장애인으로서 한빛재단과 한빛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김양수 단장과의 만남을 기대했지만 바쁜 일정으로 인해 김 단장과의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직업의 길을 열어준 한빛예술단


한빛예술단은 2010년 장애인 문화예술단체로서 국내 최초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은 시각장애인 공연단체다. 올해로 창단 13째인 한빛예술단은 관현악단인 한빛오케트스라, 관악단인 윈드오케스트라, 브라스앙상블, 현악앙상블, 체리티합창·중창단, 타악앙상블, 팝밴드블루오션 등 8개 팀으로 이뤄졌다.

현재 단원은 50명으로 모두 정직원이다. 국내에 장애인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 한빛예술단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단원 대부분이 정규직원으로 운영되는 곳은 극히 드물다.

비장애인 예술가도 정직원으로 특정 단체에 소속돼 안정된 생활을 꾸리기 어려운 요즘 장애인에게 안정된 직업생활을 제공하는 한빛예술단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한빛예술단의 창단배경에 대해 천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되돌아온 대답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소소해서 오히려 더 의미가 있었다.

한빛예술단은 연주자가 되고 싶었던 한 학생의 바람에서 시작됐다.

한빛맹학교에서 악기를 배우던 한 학생은 연주자로서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교장을 찾아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이 학생의 이야기를 깊이 받아들인 교장은 한빛맹학교에 악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음악전공과를 신설했다. 그리고 2003년 브라스앙상블을 결성하면서 한빛예술단을 만들었다.


한 학생의 바람을 허투로 듣지 않고 실행에 옮겨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많은 시각장애인의 꿈을 이뤄주고 있는 교장이 바로 김양수 한빛예술단장이다.

“한빛예술단은 악기 연주를 직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꿈을 이뤄주고,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새로운 직업의 장을 열어주고자 김양수 단장이 창단했다”고 천 사무국장은 설명했다.

사실 시각장애인들은 직업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한빛예술단은 직업영역이 안마사로 국한돼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또 다른 길이 됐다.

취약계층인 장애인으로 이뤄진 한빛예술단은 그 자체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들이 만들어낸 상품인 음악은 아픔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취약계층에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환우들과 가족을 대상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어요. 그들은 장애인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냈습니다.”

한빛예술단은 더 많은 취약계층에게 희망과 도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올해 초 자살예방센터와 협약을 맺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한빛예술단은 공연을 통해 장애에 대한 인식개선뿐 아니라 생명사랑, 나눔과 배려 문화 확산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야 맺어지는 한곡의 연주


한빛예술단의 연주는 정교하면서도 악기간의 하모니가 뛰어나다. 천 사무국장은 단원들의 실제 연습 모습을 보기 전까지 시각장애인이 청각이 발달한데다 음감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 비장애인보다 악기연주가 용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비장애인보다 연습강도가 더 혹독했다.

단원들은 손가락 끝을 이용해 점자악보를 읽거나 귀로 곡을 들으며 악보를 통째로 외운 뒤에야 실제 연주 연습에 들어갈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악보를 외워야 손으로 악기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악보를 외우지 않으면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독주가 아니기 때문에 본인의 파트뿐 아니라 다른 파트까지 모두 외워야 하죠. 그래서 더 힘듭니다.”

단원 한명 한명의 피나는 노력 끝에 완벽한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셈이다.

무대에 올라가서는 귀에 꽂은 수신기를 통해 전달되는 지휘자의 지시사항을 연주에 반영해야 되기 때문에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단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반복되는 연습은 곧 실력이 됐다.

워싱턴 케네디센터에 서다


한빛예술단은 2011년 LA한인회의 초청으로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공연을 한데 이어 지난해 7월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8회 국제장애인페스티벌’에 초청돼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한 무대에 섰다.

당시 페스티벌의 총책임자였던 발레리야 소콜로바는 “모든 단원이 시각장애인인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에서 한빛예술단이 유일무이할 것”이라면서 한빛예술단의 음악수준을 높이 평가했다.

올해 역시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위한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더 많은 장애인 예술가를 품을 수 있도록 튼튼해지는 게 목표


세계적으로 큰 인정을 받고 있는 한빛예술단이지만 운영에 있어서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공연 특성상 성수기가 비수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단원들에게 매달 급여를 지급하는 것도 반복되는 고민이라고 천 사무국장은 말했다. “매년 초 1년 공연 계획이 세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게 유동적이에요. 여름에는 비수기고 가을이 성수기죠.”

공연 수익이 곧 매출인 한빛예술단은 비수기를 대비한 자금 운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천 사무국장은 “저희와 같은 예술단체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원을 통해 재정이 튼튼해져야 더 많은 장애인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그들을 채용해 품고 갈 수 있어요.”


지난 1월 장애인 생산품 우선구매 대상에 공연예술 분야가 처음으로 선정됐다. 공공기관이 의무로 구매해야 하는 중증장애인 생산품에 공연예술이 포함된 것이다. 한빛예술단에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천 사무국장은 공공기관에서 공연할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또한 시각장애인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안정적으로 연주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빛예술단의 앞으로의 목표라고 했다.

정혜선 이로운넷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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