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볼로냐 협동조합의 사례를 한국에 널리 알린 계기는 2008년 KBS에서 방영한 '두 도시 이야기'라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볼로냐와 부산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볼로냐가 협동조합을 토대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는 이후 한국사회에 협동조합 붐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의 기조는 '협동조합은 지역물품과 협동조합 물품을 순환시킴으로서 지역경제에 기여한다'는 것이었지요.


2010년 시민단체 분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할 때 지역방송사의 취재팀이 함께 왔는데, 그 분들도 KBS 다큐멘터리의 컨셉에 큰 영향을 받으셨더군요. 그 분들도 주되게 보고 싶었던 것은 협동조합, 특히 가장 폼이 나는 소비자협동조합(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은 동네슈퍼 수준의 사이즈에서 이마트 수준의 대형매장까지 다양하게 존재하고 곳곳에 'COOP'이라는 붉은 색 마크를 붙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눈의 띄지요..)이 지역의 다른 협동조합 물건을 구매하여 유통시켜주고, 지역산물을 중심으로 판매를 해서 지역순환경제의 중요한 축이된다는 '가설'을 확인하는 내용만 찾으시더군요...

알고보니 이런 '전설'이 한국 사회에서 제법 떠돌아 다니고 있더군요. 아마도 운동성이 강한 한국의 생협 모델을 가지고, 운동성은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소비자협동조합을 바라보면서 오는 전형적인 착시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착시현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소비자협동조합이 아무 물건이나 개념없이 가져다 판다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협동조합의 가치에 기반하여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판매하는 물품을 구매하지요. 다만 그 기준이라는 것이 한국의 생협모델과 다를 뿐입니다.

연구조사차 2013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이탈리아 트렌토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기회를 틈타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에서 'COOP'이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는 물품들을 누가 생산하는지를 확인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위의 사진과 같이 트렌토 중심부에 위치한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 COOP에 가서 며칠 동안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Banca Populare는 민중은행, 우리나라의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입니다). 가급적 COOP 브랜드가 있는 물건을 중심으로 구매를 했지요.

제가 구입한 물건 중 COOP 브랜드를 가진 상품은 딸기잼, 오렌지쥬스, 토스트식빵, 토마토, 페스튜리빵, 커피였습니다.


이중 제조업체가 협동조합인 경우는 딸기잼, 오렌지 쥬스, 커피였습니다.

하나씩 볼까요?

먼저 딸기쨈. Conserve Italia라는 농업협동조합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이 협동조합은 에밀리야 로마냐에 위치해 있으니, 트렌티노 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별로 로컬하지는 않군요.

?


오렌지 쥬스. Fruttagel 농업협동조합에서 생산했습니다. 역시 에밀리아 로마냐에 위치한 알폰시네에서 제조되었네요. 오렌지가 어느 지역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햇습니다.

?


커피의 제조사는 Co.ind라는 커피 제조전문 협동조합입니다. 이것도 에밀리야 로마냐에 있네요. 에밀리아 로마냐에 제조업체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COOP이라는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의 본사가 에밀리야 로마냐에 위치해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에밀리야 로마냐 자체가 워낙 협동조합 전반이 발달한 곳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에밀리야 로마냐의 소비자협동조합은 에밀리야 로마냐 지역 협동조합의 물건을 주요하게 구매한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COOP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그다지 '맞지 않는' 설명이 될 수 있겠군요.

나머지 토스트빵과 페스츄리, 그리고 토마토는 모두 일반기업이 제조업체이었습니다.




페스츄리는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로컬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롬바르디아에 본사를 두고, 나름 가까운 베로나에 있는 공장에서 제조되었네요. 일단 로컬이라고 쳐 주지요.
토마토는 시실리 섬 원산이고 (많이 멀군요) 유통회사는 역시 에밀리야 로마냐에 소재한 회사입니다.
토스트빵은 역시 꽤 떨어져있는 토리노 지역에서 온 것이었습니다.?그렇다면 공산품은 어떨까요?

잠깐의 일정이라 공산품을 살 일이 없었는데 마침 숙소에 COOP 브랜드 제품이 있어서 확인해보았습니다. 제품은 소금, 부엌세척제, 식기세제였습니다. 이중 식기세제는 협동조합이 생산했고, 나머지는 일반기업이었습니다.


하나씩 다시 보면...


먼저 소금. 일반회사에서 제조하였고, 공장은 에밀리야 로마냐입니다.


부엌세척제. 이건 영국계 회사인 McBride가 제조했더군요. 공장은 트렌티노에서 가까운 롬바르디아 지역이었습니다.


식기세제. 이것은 에밀리야 로마냐 지역에 위치한 협동조합에서 생산한 제품이었습니다.

"어? 그럼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은 아무거나 가져다 파는거네?"

이건 또 다른 극단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지요. 소비자협동조합이 자체 브랜드로 물건을 갖추는데는 일단 가격과 품질이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물품구매 부서가 있는 본사의 위치와 제조업체의 거리도 알게 모르게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특정물품은 협동조합에서도 인근 지역에서도 생산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경우는 당연히 멀리 떨어진 일반기업의 물건을 구매하겠지요. (한국과 달리 대부분의 유럽 소비자협동조합들은 노동자계급에 저렴한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물품거래 품목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 COOP이 COOP브랜드를 붙이는 기준에는 자체적으로 정한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COOP 브랜드 품목은 이 원칙을 준수하면서 제품을 제조하였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e-coop.it/web/guest/i-valori-del-prodotto-coop)

편의 (convenienza) - 보다 좋은 품질과 보다 좋은 가격
품질 (buono) - 소비자조합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인정받은 품질
안전 (sicuro) - 철저한 안전 관리
윤리 (etico) - 인권과 노동권을 존중하는 생산과정
생태 (ecologico) - 생산 및 포장 등에서 친환경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탈리아 소비자협동조합은 생산업체에 좋고 싼 물건 뿐만 아니라, 윤리적, 환경적 책임도 부과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본주의 유통업체들도 이렇게 할까요?

결론적으로...

협동조합운동은 늘 이상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발전해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고, 정의롭기도 하고. 조합원 중심이기도 하고, 사업중심이기도 하고...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발전해온 궤적에는 다양성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고, 많은 복잡함과 모호함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사람중심으로 모여있는 협동조합이 늘 가지고 있는 잠재력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협동조합 운동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할 수밖에 없고, 이를 잘 이끌어나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사실 이건 사람사는 곳 어디서나 똑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렇습니다. 협동조합은 사람사는 모양 그대로의 조직입니다. 사람살이가 복잡하듯이 협동조합도 복잡합니다. 특히 역사와 제도, 환경과 사람이 다른 외국의 협동조합은 더욱 복잡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복잡함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문제의 시작입니다.


복잡한 것을 복잡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있는 것을 있는 것대로 보기 위한 노력.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생각만 하면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소통의 부재, 과도하게 빠른 삶의 속도, 성찰의 부재, 반지성주의, 사회운동까지 파먹고 있는 영웅만들기와 모범사례 쫒기,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정보의 폭발 등등은 점점 더 한국사회를 피곤한 사회로 만들고 성과와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진정한 소통과 이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 1-2주일 방문으로 한 나라의 100여년이 넘는 협동조합, 사회적경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몇 년을 살아도 매일매일 새롭기만 한데 말이지요... 혹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경제 때문에 유럽을 방문하시게 되면, 많이 알아가시려고 노력하시기 보다는 차분히 하나하나를 즐기고 가시길 바랍니다. 언어도 안 통하고, 맥락도 다른데 어찌 이해가 되겠습니까? 단박에 이해가 되는 것은 도리어 많은 경우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한국상황을 바라보던 인식틀로 다른 맥락의 것들을 '쉽게' 해석해버리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이해하고 영감을 받아 한국에 가서 잘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해외사례를 두고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이 요구될 때는 언제나 '이것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하는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늘 무겁게 고려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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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회적경제 이야기"?운영자 엄형식입니다. "사회적경제 이야기"는 보다 정확한 번역, 맥락에 부합하는 해설과 분석, 합리적 인식론에 기반한 현장이해를 통해 해외 사회적경제 현황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공간입니다.

- 벨기에 리에쥬 대학 사회적경제센터 박사과정 연구원, 사회학 (2007 ~ 현재)

- 국제노동자협동조합/사회적협동조합연맹 (CICOPA) 통계조사 담당 (2007 ~ 현재)

- EMES 연구네트워크 박사과정 네트워크 회원 (2008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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