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이후, 127명이 연이어 죽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도 안다. 살인 혐의자도 안다. 그런데 사법처리가 없다. 피해 보상도 없다. 지난해 가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습기 살균제 살인 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올해 5월 기준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401명이며, 그 중 127명 즉 31.6%가 숨졌다고 보고한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산소 튜브를 끼고 연명하고 있거나 2억 여원에 가까운 자비를 들여 폐이식을 받은 채 투병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관련 정부의 질병관리본부 ‘폐 손상 조사 위원회’ 조사위원을 지낸 임종한 인하의대 직업환경의학 교수(52)는 최근 <아이 몸에 독이 쌓이고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치명적 원인으로 ‘정부의 관리 소홀’을 꼽는다. 외국에서 가습기 세정제로 쓰던 물질을 국내 제조업체들이 가습기 살균제로 탈바꿈시켜 판매한 게 사건의 발단인데, 정부는 이를 사전에 막지 못했다.



소비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가습기에 살인적인 살균제를 넣었다. 이 살균 성분은 폐 속 깊숙이 침투해 폐를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다. 피해자는 대개 산모와 영아, 어린 아이들이었다. 시스템이 사람을 죽였다.



임 교수는 이러한 일의 재발을 막으려면 시민이 함께 나서 시스템과 법을 정비하고 지역사회 공동체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지키려면 한 사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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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한 인하의대 교수 사진 머니투데이 ⓒ구혜정 기자 photonine@]



첫 아이와 아내 동시에 잃은 가장…유럽이었다면


임 교수는 폐 손상 조사 때 만난 한 30대 남자의 사례를 전했다.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남자는 직장을 그만 둔 상태였다. 사회생활도, 일상생활도 엉망이었다.



남자는 신혼의 아내와 첫 아이를 함께 잃었다. 집에서 산후 조리를 하면서 가습기에 살균제를 넣은 게 문제였다. 조사 받던 남자는 당시를 회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했다.



전문가답게 감정을 누르며 말을 이어가던 임 교수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 임 교수는 “애를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데 대해 피해자 가족의 죄의식과 상처가 싶었다”고 말했다.



아내와 아이의 폐를 망가뜨린 물질은 CMIT와 MIT였다. ‘메칠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 ‘메칠이소치아졸리논’이라는 어려운 학술용어로 불리는 이 성분은 주로 살균 소독 방부제로 쓰인다. 해외에선 피부 접촉조차 제한하는 독성물질이다. 지난해 9월에야 환경부는 이 물질들을 ‘인체와 어류 등에 유독한 물질’로 지정했다.



부부가 만약 유럽에 살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에선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를 통해 화학물질을 쓴 모든 제품을 관리한다. 임 교수는 “해외에선 화학물질이 만들어지면 먹느냐, 피부에 닿느냐, 흡입하느냐에 따라 인체 미칠 영향을 따로 평가 받는다”며 “세정제 성분으로 허가 받은 물질이라도 살균제에 쓸 땐 따로 평가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다르다. 그는 "당시 12개 회사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해 한두 업체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문제가 일어났는데 정부도 위험성을 몰랐다"고 지적했다.



"당시엔 가습기 살균제가 의약외품이 아니라 공산품으로 분류돼 유해성이나 안전성 평가를 하지 않았어요. 화학물질 관리가 제대로 안 된 것이죠. 현 체제로선 재발을 방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제품의 유럽 등 해외 수출에 대비해 ‘한국판 REACH’를 만들겠다며 지난 5월 공포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 발효되더라도 '제2의 살균제 살인사건'은 막을 수 없다. 당초 상임위 통과 법안과 달리, 본회의에선 화학물질을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생산자’를 관리대상에서 뺐기 때문이다.


불산 유출 때 몇백 원짜리 해독제만 갖다놨어도…


그는 인터뷰 중 ‘시스템’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독성물질은 시스템적으로 피해가 간다”라든가,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대응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라든가.



그가 말하는 ‘시스템’은 단순히 ‘체제’라고 바꿔 말하기엔 좀 더 넓은 의미로 들렸다. 한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생태계’라고 할까.



한 예로, 구미공장들에서 발생했던 불산 유출 사고가 다시 터졌다고 치자. 한국의 직원들은 119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이었다면 직원들이 중독관리센터(PCC, Poison Control Center)에 전화해 응급조치법을 물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안전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먼저 대처했을 수도 있다.



“불산은 몸에 닿으면 통증으로 바로 인지하기 때문에 대처만 서두르면 살 수 있어요. 빨리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칼슘그루코네이트라는 해독제를 먹어 심근 경색을 막는 거죠. 이런 조치가 없으면 병원에 가는 동안 사망에 이를 수도 있어요. 약값요? 한 알에 몇 백 원이에요. 몇 만 원이면 직원 전부 먹을 양을 비치할 수 있어요.”



그는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고 존엄하다는 의식만 있다면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건 영리 추구가 사명인 기업의 책임감에만 의존할 수 없다. 지역의 독성물질 전문가들과 시민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인구가 200만 명이 넘는 지역마다 공공조직으로 중독관리센터를 두라고 권한다. 지역에 따라 노출 위험이 높은 독성물질이 다른데다 물질에 따라 대처법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미공장에서 누출될 수 있는 독성물질의 종류와 안산에서 위험 높은 물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의의 사고 땐 그 지역정보를 잘 아는 전문가가 있어야 빠르게 응급대처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



“미국, 일본, 중국 같은 지역에선 정부나 지방정부의 예산으로 중독관리센터에 독성물질 전문가와 약사를 상주하게 합니다. 독성물질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에 119 응급대원들도 그걸 다 알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정보를 센터가 알려주는 것이죠.”



중국조차 갖춘 ‘시스템’이 한국엔 왜 없을까. 임 교수는 “기업은 신제품을 만들어 이익은 가져가도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며 “이에 시스템적으로 대응하려면 법과 정부가 움직여야 하고 그러려면 시민사회가 먼저 여론을 형성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환경독성보건학회 환경역학분과위원장인 임 교수는 환경부 장관상을 받은 환경의학자일뿐만 아니라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의료생협 조합원과 의료진 덕분에 지금의 인식과 접근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의료생협은 24년 전 가정의학 전문의로 출발했던 그가 환경의학, 사회의학 전문의로 거듭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0년 인천에서도 달동네로 유명한 부평구 일신동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판잣집에 살던 노인은 제대로 먹지도, 치료 받지도 못해 욕창을 안고 살았다.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는 급기야 직장을 잃고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겪고 있었다. 맞벌이 나간 부모 대신 스스로 라면이나 각종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알레르기 질환을 달고 살았다. 열악한 주거 환경 때문에 천식을 앓는 아이도 많았다.



질병은 가난과 함께 대를 이어 내려갔다. 베트남전 참전 후 여드름 등 피부 발진으로 고통 받고 있는 40대 남자의 아들은 말초신경병으로 오래 걷지 못했다. 고엽제 때문이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환자들을 보면서 역으로 우리가 얻는 질병의 대부분은 예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의료인과 지역주민의 힘을 모아 의료생협을 만들었죠. 인천평화의료생협과 안성의료생협이 그렇게 탄생했어요."



임 교수는 "생활 여러 곳에 위험이 많아진 지금은 더욱더 전문가와 일반시민이 협동해야 건강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의료생협을 비롯해 주치의 역할을 하는 1차 의료진, 지역환경의 안전을 지켜줄 공공조직을 시민과 전문가들이 함께 요구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위험도 유비쿼터스(Ubiquitous,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 시대입니다. 생활 속 어디에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혼자선 대응할 수 없어요. 한 사람이 건강하려면 함께 건강을 지켜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머니투데이 양해를 구해서 글을 올립니다.]


편집자주.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설계사들이 있다. 이들은 불평등·환경훼손·인권침해·동물학대 같은 사회 문제를 사회적기업·협동조합·비영리단체·기업의 사회적책임 같은 활동을 통해 해소하자고 나선다. 사회를 바꾸는 아이디어의 실행자, ‘소셜디자이너(Social Designer)’들을 머니투데이가 소개한다.

작성자 = 이경숙 머니투데이 차장 겸 이로운닷넷 대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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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20여명 죽인 ‘보이지 않는’ 살인자, 막으려면|작성자 이로운닷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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