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케이블 채널 폭스뉴스의 회장이었던 로저 에일스의 실제 성추행 사건에 바탕을 둔 영화 '밤쉘(Bombshell)'. 이 사건으로 에일스는 사임했고 폭스뉴스는 피해 여성들에게 5000만달러(약 600억원)를 지급했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봤다. 개봉 시점이 절묘했다. 마침 우리 사회는 잇따라 터진 권력형 성범죄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다.

밤쉘(Bombshell)은 미국의 거대 보수 언론인 케이블 채널 폭스뉴스의 회장이었던 로저 에일스(1940-2017)의 실제 성추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건은 2016년 전(前) 폭스뉴스 앵커인 그레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라고 공개적으로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미투 운동의 시작점이 됐다. 

에일스가 승소할 줄 알았던 소송은 불과 16일 만에 그를 파멸로 몰았다. 폭스 뉴스 간판 앵커인 메긴 켈리를 비롯해 20여 명의 여성 피해자가 추가 폭로를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에일스는 칼슨에게 2000만 달러(약 239억 원)의 합의금을 지불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사건이 먼 나라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던 까닭은 긴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성인식과 이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가 보여준 씁쓸한 민낯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35년 전 방송사를 다닐 때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래된 일이라 세세한 기억까지 떠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나 내 기억들은 ‘그땐 몰랐었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성희롱에 가까웠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예를 들어 동료 여직원들을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야한 농담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고 때론 회식이랍시고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이 나오는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는 서로가 무지했고 나를 포함해 대다수 여성들은 문제를 제기 하기보다는 애써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미약하나마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입사 후 한 참의 시간이 흐른 뒤다. 그건 생살여탈권을 쥔 상사 앞에서 부적절한 언행을 감내해야 했던 비정규직 직원들이나 막 입사한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들을 위해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이는 인간의 권리였다.

영화 속 주인공 세 여자 중 유일한 가상의 인물인 케일라 포스피실은 10년 만에 자신도 피해자 였음을 밝힌 동료 앵커에게 “ 왜 좀 더 일찍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랬다면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한다. 100% 수긍하는 건 아니지만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권력형 성범죄가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록스타 이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최고령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7)는 “진정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 너머의 일, 지역사회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일을 해야한다” 라고 말했다. 

또한 “편견과 억압이라는 물을 빼내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수단 즉 법률의 지혜, 제도의 품격, 이성적 사고, 공감적 배려에 기대야 한다”리고 주장했다. 우리는 과연 이 가운데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 묻고 싶다. 

2017년 전 세계를 휩쓴 성폭력 고발 운동 (#Me Too)을 촉발시킨 그레천 칼슨은 그 이듬해 직장 내 성희롱을 비롯한 모든 성폭력에 대응하는 자세에 대한 글을 남겼다. 책 이름은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Be Fier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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