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고객으로부터 예금을 받을 수 있다. 망해도 5천만원까지 보전받을 수 있고, 지급 결제도 편해 고객은 은행에 돈을 맡긴다. 예금을 취급한다는 건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엄청난 마법이 숨겨있다.
고객이 은행에 100만원을 입금했다면, 은행은 지급준비금 10만원(지급준비율 10%)만 남기고 90만원은 수익을 창출할 ‘대출재원’으로 활용한다. ‘지급준비금’이란 예금주가 돈을 찾아갈 때를 대비하기 위한 돈으로 고객이 한꺼번에 찾아가지 않기 때문에 일부분만 남기면 된다. 실제 법정지급준비율은 일반예금은 7%, 정기예금 및 정기적금은 2%, 장기주택마련저축 및 재형저축은 90%라고 한다.
90만원을 대출받은 자는 10만원을 쓰고 80만원을 은행에 예치한다. 은행은 80만원 중 8만원만 남기고 72만원을 또다시 대출재원으로 활용한다. 이미 예금 100만원으로부터 162만원의 대출재원이 형성됐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면 얼만큼의 대출재원이 생길 수 있을까? 지급준비율 10%이라면 예금의 10배, 5%라면 20배의 대출이 가능해진다. 이런 효과를 “예금통화를 창출한다”고 표현하는데, 예금을 취급하는 은행이 매력적인 이유다.
그러나 은행이 대출해 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 손실이 커져 부실해지는 경우, 은행에 돈을 맡겨 두었던 예금주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아가는 사태(Bank run)가 일어날 수 있다. 금융위기 때에도 세계적인 은행들이 고객에게 돌려줄 돈이 없어 파산했고, 금융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따라서 이런 마법을 부릴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시중은행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설립자본금 1천억원이 필요하며, 최근 설립된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 250억원, 저축은행은 40억~120억원이다. 보통 설립자본금보다 훨씬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 인가를 신청하며, 운영 시에는 지급여력을 담보할 자본이 더 필요하다.
신용협동조합의 최소 설립자본금은 5천만원~3억원으로 매우 낮다. 어떤 조직이길래 적은 설립자본금으로 예금이라는 마법을 다룰까?
신용협동조합은 신용이 부족한 이들의 연대기구다. 협동으로 스스로 자금을 조성하고 이용하면서 구성원들의 자질 향상을 도모하는 게 목적이다.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동유대를 기반으로 조합원 간 자금 융통 등을 통해 편의를 제공한다.
금융자유화와 세계화 흐름 속에서 신협 간 합병, 조합원 규모 확대 등으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여전히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신협이 있다. 1850~1860년 독일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신협 운동은 당시 농산물 흉작으로 고통받는 도시영세민과 농민을 자조 협동으로 돕고자 설립했다. 오늘날 도시영세상공인을 위한 ‘슐체델리치조합’은 독일의 ‘국민은행(Volksbanken)’으로, 농민을 위한 신협인 ‘라이파이젠조합’은 ‘라이파이젠은행(Raiffeisenbanken)’으로 발전했다.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펜데믹) 이후에 사회적경제, 사회혁신, 사회적가치를 위한 금융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책자금을 통해 자금 공급을 늘렸던 기존의 사회적금융 정책을 넘어선 새로운 아젠다가 필요하다. 이는 민간의 사회적금융 생태계 조성이 목적이어야 하며, 현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의 작동원리를 거스르지 않되. 연대 행동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 5년간 자조기금, 공제기금을 통해 민간의 자본을 축적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공적자금이 유입되어 규모화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만약 지역별 사회적금융 중개기관들이 예금을 통해 조합원과 지역사회 발전과 사회적가치에 공감하는 시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기반으로 10배의 신용을 창출할 수 있다면 지역사회가 좀 더 나아지진 않을까?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을 지켜가고자 하는 신협 속에서 이런 고민을 풀어낼 수는 없을까? 사회적경제를 아우르는 단체신협 속에서 사회적경제, 사회혁신 주체들의 다양한 자조기금, 공제기금이 지점형태로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향후 우리 사회가 만들게 될 ‘사회적 은행’은 독일의 라이파이젠은행처럼 협동금융을 기반으로 구체화할 수도 있다. 참여를 통한 변화의 씨앗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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