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n번방 방지법’의 하나로 형법상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기준 연령이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된 법안이 지난 5월 19일 공포 후 즉시 시행됐습니다. 이 법안은 더 많은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현행법에서의 성폭력 판단 기준이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이전의 논의들을 일축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게다가 성적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여전히 생물학적 연령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성적 권리에 대한 폭넓은 논의과정이 사라지게 되었죠. 이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지난 6월 4일 온라인 집담회 ‘16세 미만의 '동의' : 가해자 처벌과 역량 보장 사이에서’를 통해 ‘동의’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저는 이 논의를 보면서 의료행위에서의 ‘동의’, 즉 ‘정보에 기반한 동의,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 사전 동의’ 등으로 번역되는 ‘informed consent’ 개념을 떠올리게 됐는데요. 왜냐면 성적 행위와 의료행위에서 ‘동의’의 의미를 다루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몇 세 미만이면 동의 능력이 없다는 전제를 두고 생물학적 연령을 어떤 능력의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점, 두 번째는 몸에 대한 경계 침범의 측면에서 신체의 자율성(autonomy)과 관련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권리를 중심으로 했을 때 동의의 개념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보게 합니다.

성적 동의에서의 ‘동의’란 신체적 자율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런저런 조건이 갖춰졌을 때에 허용되는 조건부 동의입니다. 밀레나 포포바의 ‘성적 동의, 지금 강조해야 할 것’에 따르면,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지 동의를 철회할 수 있고,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의료행위에서의 ‘동의’는 환자의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원칙으로 하여 스스로 의료적 결정과 치료를 선택하고 의료적 개입을 거절하고 동의를 철회할 수 있는 권리까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의서에 서명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전 동의와 같은 의미가 아니며, 분명하고 이해가능한 의사소통을 거쳐 의료적 결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사소통 과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프라이버시가 존중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 환자가 편안한 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여 천천히 주요 핵심을 반복해가며 최대한 명확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면 보다 전문적인 통역사와 함께 하고 통역이 원활치 않다면, 바디 랭귀지와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이나 시청각적 보조 도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잘 이해했는지를 재확인하는 과정까지 포함해 의사소통에서 있을만한 거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의료행위에서의 ‘동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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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자격을 얻고 나서 시작하는 인턴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환자나 보호자에게 수술동의서를 받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어떤 수술에 얼마나 심각한 합병증까지 생길 수 있는지를 미리 고지하고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자기방어적인 태도만 배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현재 수련병원에서는 ‘동의’와 관련된 보다 더 체계적인 훈련과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의료행위에서의 ‘동의’가 환자 자신을 위한 의료적 결정까지 이르기까지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를 대할 때 위압감 없는 적절한 어조와 태도로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혼란을 주지 않고도 충분히 핵심을 짚어주면서 이해가 되도록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또한 비장애인, 비청소년, 비트랜스젠더의 신체를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연령과 장애 유형이나 성정체성, 외국어사용 등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산부인과에서는 질경, 질초음파와 같은 기구 사용, 자궁경부세포검사, 예방접종 등 성적 건강과 연관된 검사와 치료들이 시행되기 전에 위의 ‘동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폭력 피해를 입은 환자를 대할 때에는 또다른 신중함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동의’의 바탕은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나이, 장애, 외양, 행동, 신념 등에 따라 능력을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벽들을 제거하는 것이 의료인과 나아가 국가의 역할인 것이죠. 성적 행위나 의료행위에서의 동의를 포함하여 모든 ‘동의’는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조건에 대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그 개념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 ‘동의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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