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를 가져와라”,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치밀하게 실증하라” - 후스 

”만약 내가 해부학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매우 작은 곤란한 일(질병)을 겪게 된다면 반드시 충분한 증거가 없이는 결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생에 대한 기묘한 해결책을 얻는 데는 왜 이렇게 엄격한 조건을 적용시킬 수 없다 말인가? 비유와 억측으로 자신의 말을 남용하는 것은 쓸모가없는것이다.” - 정문강

우연히 한국에 분자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정착시킨 노과학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그는 매우 권위적이고 흔히 말하는 꼰대 서울대 교수였는데, 학생들이 식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나타나지도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라 대부분이 희미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의 말이 하나 있다. 당시 이미 60이 다 되어가던 그 노교수는 평생 전공과목 교과서 이외에는 그 흔한 소설책 한 권의 독서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교과서와 논문만 읽어온 자신의 독서 편력을 조금은 부끄러운 듯 학생들에게 말하며, 연구자로 바쁜 자신의 상황을 학생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듯했고, 부끄럽게도 권위에 눌린 학생들은 웃으며 그 처참한 고백을 아무렇지 않은 듯 동조했다.

비단 이 노교수만의 일일까.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어 간다는 과학기술계의 리더들 중에서, 교과서 이외의 균형 잡힌 독서와 글쓰기로 단련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굳이 인문학자들처럼 읽고 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학사를 통해 위대한 과학자들은 곧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잘 알고 있다. 다윈도 아인슈타인도 뉴턴도 자신의 학문을 고급교양의 형태로 쓰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과학기술행정가로 유명한 버네바 부시 등의 과학기술자들 역시 자신의 정책적 사고를 다양한 고전과 책들을 참조해 유려한 글쓰기로 출판하는데 익숙한 지식인들이었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읽고 쓰기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과학기술계 지도자들이라고 다를 리 없다. 하지만 권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그 권력을 합리적이고 합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읽기와 쓰기에 능숙해야만 한다. 바로 그 능력이 한 인간의 이념과 사상을 주조하기 때문이다.

실증주의, 중국의 근대를 주조하다
정문강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는, 서양에서 실증주의라 부르는 하나의 철학적 사조가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를 감싸며 떠오르던 시기였다. 논리실증주의로 알려진 빈 학단의 과학사상이 유럽을 중심으로 미국의 실용주의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물리학자이면서 새로운 철학적 인식론을 집대성한 에른스트 마하의 실증주의가 빈 학단에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중국에도 5.4 신문화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서양 철학이 소개되기 시작한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에 소개되었고, 합리주의, 생철학, 니체철학, 칸트철학, 헤겔철학, 과학철학 등의 유행이 시작됐다. 이처럼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 중에서 중국의 근대적 전환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들을 꼽자면, 마르크스주의와 실증주의, 그리고 서양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현대 신유학 정도일 것이다. 이 중 실증주의는 중국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철학적 사조로 각광받았다.

중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후스는 존 듀이의 실용주의를 중국 상황에 맞게 변용시켜 사회운동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정문강과 함께 과학과 현학 논쟁에 참여했다.

실증주의의 철학적 시조라 불리는 어거스트 콩트는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를 주장했고, “실증할 수 없는 것이나 이를 초월하는 논의와 물음을 무용하다”고 여겼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증할 수 있는 것을 ‘현상’으로 제한하며, 이렇게 제한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첫째로 현상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둘째로 이 사실들을 특정한 법칙에 따라 정리하려 시도하며, 셋째로 인식된 법칙들에 의해 미래 현상을 예견하고 그에 대처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결국 과학적 인식과 지식의 발전을 인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하며, 곧 실증주의적 철학 속에는 ‘진보’에 대한 강한 신념과 믿음이 녹아 있다.

실증주의의 전통이 거의 전무했던 중국사회에, 서양에서 수입된 실증주의는 당시 중국의 구망과 계몽을 갈구하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중국 근대에 서양에서 소개된 실증주의는 옌푸와 왕궈웨이 등이 영국에서 유학하며 헉슬리, 스펜서, 밀 등의 과학과 과학사상을 소개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1920년 듀이와 러셀 등이 중국에 와서 강연한 것을 계기로 듀이의 실용주의와 마하주의라 불리는 경험비판론 등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정문강은 바로 이 시기에 실증주의를 받아들였으며, 그가 수학했던 과학과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자연과 사회를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와 방법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수학했던 철학자 호적(후스)은 실용주의 철학과 실증주의 방법론을 통해 중국을 변혁시키는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호적이 말한 “증거를 가져와라”,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치밀하게 실증하라” 등의 구호는 봉건주의적 사상과 전통 미신을 타파하려던 젊은이들에게 크게 각광받았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근대 실증주의 사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첫째 서양의 경험주의, 실용주의, 실증주의 등이 모두 실증주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중국의 봉건주의와 전통 미신을 상대하는 거대한 전선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 전선에는 정문강 같은 과학자와 송학보다는 한학을 중시하는 합리적 계몽주의자들이 합세했다. 둘째, 중국만의 독특한 실증주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과학적 방법론이 전통 철학을 비판하는 가장 유효한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 하지만 중국의 실증주의 사조는 이후 과학에 대한 경시가 극복되지 못하면서 독립적인 사조로서의 명맥을 잃게 되었다. 정문강은 20세기 초 중국에서 잠시 밝게 빛났던 과학적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주자였다.

호적과 정문강,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동지의식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정문강은 영국 유학을 통해 다양한 과학자들과 서구사상가들을 직접 만나거나 그들의 책을 통해 그의 과학사상의 요체를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지질학 연구를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 편, 사상적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상아탑을 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군사 방면의 지식에까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신문화운동에 참여하고 훗날 과현논쟁에 참가하는 계기 또한, 평소 자신의 전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교류했던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존 듀이 밑에서 수학하고 중국으로 돌아온 베이징대학의 교수 호적과도 활발하게 교류했고, 러셀의 중국 강연을 목격하고 나서 지질학과 지리학의 범위를 벗어나 광범위한 인간관계, 사회활동, 언론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런 그의 사회운동가적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광범위한 독서편력과 끊임없는 글쓰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정문강을 매우 높게 평가했는데, 그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거두었다는 점,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영미 학술잡지에 직접 논문을 실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는 점,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사상가의 저술을 체득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중국 문학에 대한 높은 소양과 유창한 글쓰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았다. 마치 과학자이면서도 대중은 물론 인문학자들과도 대등하게 대화했던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하처럼, 정문강은 중국사회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과학사상가로 당시 중국을 근대화하려던 여러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과학자 정문강은 당시 젊은 신진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루쉰과 함께 손꼽히던 호적과 깊게 교류했다. 

1920년 존 듀이가 중국을 순회하며 강연하던 당시의 사진. 당시 존 듀이의 방문은 중국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특히 그의 제자 후스는 존 듀이의 방문으로 금새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호적은 존 듀이에게서 수학하면서 반형이상학적이고 경험적 증거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5.4 신문화운동 시기에,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중국에 소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호적은 백화문을 통해 문학혁명을 주도한 인문주의자였지만, ‘실험주의’라는 독특한 사상으로 중국 근대의 계몽사조를 이끌었다. 호적의 실험주의란 그의 유명한 언명인 “대담한 가설과 세심한 증거 찾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비판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호적은 인문학자였지만 중국의 새로운 문명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만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여겼고, 이를 듀이와 헉슬리에게서 배웠다고 말했다. 

“듀이는 나에게 목전의 문제를 연구하고 어떤 문제든 증명되기 전에는 가설로서 받아들이기를 가르쳐 주었고, 헉슬리는 어떻게 회의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지질학자 정문강과 문학평론가이자 역사학자였던 호적이 뜻을 하나로 모아 중국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역사를 돌아보면, 여전히 말로만 통섭과 융합을 외치는 한국 지식인사회의 허망함이 눈에 밟힌다. 누군가는 그 둘을 이어준 것이 에른스트 마하의 감각주의, 존 듀이의 실용주의, 헉슬리의 불가지론 같은 철학적 사상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 둘은 중국의 근대화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 속에서 우연히 비슷한 시대정신을 공유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시 서구의 지식인 사회가 그랬듯이, 오래된 전통의 중국에도 과학이 사회적 변화를 위해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과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거대한 변화에서 중국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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