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이 연구하는 유럽 출신 석사생이 연구실에 막 들어왔을 때 일이다. 그가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국 대학 연구실에도 지원하고 면접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연구실에 오기 전, 1년 간의 석사 연구를 진행할 실험실을 알아볼 때 말이다. 해외 생활 중 한국으로 연구하러 가고 싶어 하는 외국 학생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아 놀랐다.
그 연구실은 박사 과정생을 모집하던 중이라 결국 탈락했고, 현재 필자가 있는 연구실로 오게 된 거다. 다행이다 싶었다. 나중에 이 친구에게 한국에 장기간 연구하러 가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했다. 유럽과 완전히 다른 연구 문화를 차치하고라도, 대다수의 연구 기관들이 아직 외국 연구 인력을 받을 만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국어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한, 영어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틀린 판단이 아니라는 걸 최근 칼럼으로도 확인했다. 외국인 대학원생을 위한 시스템이 없어 한국 대학원생들이 업무 부담을 떠안은 문제점을 다룬 내용이었다.
오스트리아 연구소에서 근무 중인 필자는 이곳에서 외국인 연구자다. 독일어가 공용어인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모든 게 다 낯설었다. 특히 영어 서류를 제공하지 않는 비자 업무와 같은 관공서 업무는 정말 어려웠다. 공식 문서 내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아 번역기로도 뜻을 찾기 힘들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변 현지인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뻔했지만,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했다. HR부서(Human Resource, 인사부에 해당)가 제출 서류와 문서들을 영어로 번역·정리해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원은 일괄 처리되지 않는다. HR 부서가 외국인 연구원 개인·가족의 상황에 따라 맞춤으로 각각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비자 갱신 등 연구 외 생활에 꼭 필요한 행정 업무는 필요한 서류도 마련해 준다. 필자의 연구소가 특별한가 싶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스위스·독일 등에서 연구하는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다. 적어도 서너개 연구실에 1명 정도 행정 업무 담당 비서가 있어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등 기관마다 형태만 다를 뿐 위와 같은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국가의 연구 기관들이 뛰어난 국외 연구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서 갖춘 시스템은 행정 업무뿐만이 아니다. 한 친구는 독일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하며 당시 지도 교수와 갈등이 있었을 때, 연구소에서 그와 영어로 상담을 지원하고 차별 없이 사실만으로 판단, 중재해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스위스에 있는 친구는 최근 한국인 박사님이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 연구 지원 부서에 전문 인력 영구직으로 취직했는데, 독일어 실력이 아주 기초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적어도 연구소 안에서는 외국인 연구자의 능력이 우수하면 언어 능력과는 상관없이 안정된 직책을 맡을 수 있다. 또 그가 영어만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 문제 없도록 문화와 시스템이 연구소 내에 갖춰져 있다.
혹자는 해외에 근무하면 그 나라 말은 당연히 어느 정도 익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외국인 연구 인력을 유치하는 목적을 생각하면 공용어 구사 문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은 영어 능력만 있으면 그 나라 언어를 못 해도 된다. 기본 생활에 큰 어려움 없도록 연구 기관에서 지원해줘야 해외에서 더 많고 우수한 인력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것. 필자의 연구소는 외국에서 온 연구자들과 그 가족 중 희망자에게 독일어 수업을 제공한다. 외부 독일어 강의 기관과 연계해 연구소 안에서 수업을 하고, 교육비는 모두 지원한다. 강의 시간이 안 맞거나 외부에서 독일어 수업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강습비를 지원해 독일어를 습득하도록 유도한다. 반대로 연구소를 영어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해 영어가 어려운 현지 직원 대상으로 강의를 개설하고 교육비를 지원한다. 이런 노력으로 연구소는 언어 소통의 간격을 최소화하면서 외국인 연구자들에 호의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 연구 기관들의 외국 연구 인력은 해마다 증가한다.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꼽을 수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전체 연구원의 약 35%가 해외 연구자고, 국가 차원으로도 더 많은 우수 해외 인재를 한국으로 유치하려고 2019년 초 ‘글로벌 과학기술 인력 유치 및 활용 방안’이라는 정책안을 심의·의결했다. 해외 최고 수준의 인력을 한국에 오게 하려면 정책적 뒷받침에 더불어 외국인 연구 환경과 시스템을 하루빨리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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