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1950년 6월 25일, 13만5000명 이상의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오늘날까지 상처를 남긴 전쟁이 시작됐다. 3년 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됐지만 평화협정이 없어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CNN은 25일 6.25전쟁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6가지 사실을 보도했다.

1. 평양은 1950년 8주 동안 미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미군 전쟁사에 따르면 1950년 10월 19일 미군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사단이 북한 수도를 점령하고 미 8군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본부 건물에 진격 본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미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이 참전해 급히 남하하면서 12월 5일 평양에서 미군은 후퇴했다.

2. 한국전쟁에서 투하란 폭탄이 2차 대전 때 보다 많다.

6.25전쟁 중 미군의 작전은 거의가 무자비한 공중 폭격 작전이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 항공기는 북한에 고폭탄과 방화탄 63만5천t을 투하했다. 전쟁 역사학자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이 아시아태평양 저널에서 인용한 수치에 따르면, 미국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태평양에 투하한 폭탄이 50만t 이다.

전쟁 중에 북한의 주요 건물은 거의 파괴됐다. 1950년 11월까지 북한은 주민들에게 주택과 대피를 위한 방공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북한이 이런 폭탄테러로 공식 사상자 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기록보관소에서 입수한 정보로는 28만 명을 넘는다. 북한은 미국의 공습에 취약하다는 교훈을 잊지 않고 정전 이후 반세기 동안 대공 방어 강화와 지하 시설 구축, 그리고 핵무기를 개발했다.

3. 북한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일으킬 것을 설득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패전한 일본이 점령했돈 한반도의 북반부는 소련이, 남반부는 미국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남북을 무력으로 통일해 공산통치하에 두고자 했고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구했다는 윌슨 센터(Wilson Center)의 기록이 있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처음 남침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한국에 점령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과의 분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해 여름 그 부대가 철수하자 그 요청을 승인했다. 같은 해 마오쩌둥 중국 지도자는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받고 미국이 개입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원군이 되겠다고 동의하며 남침의 청신호가 켜졌다.

4. 한국전이 대만의 공산당 접수를 막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전에서 패한 후 장개석과 민족주의 세력이 도망친 대만을 침략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 때 한국의 전투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해역에 미국 군함을 파견했다. 이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대만 접수가 임박 했음을 보여준다.

미 7함대의 출현으로 대만의 침략을 각오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중공군을 한국 전선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0월 19일까지 25만명이 넘는 12개 사단의 중국군이 북한에 주둔했고 18만 명 이상의 병력이 전사했다.

5. 6.25전쟁에서 처음으로 제트기 대 제트기 공중전이 있었다.

독일 메세르 슈미트 262 제트기가 2차 대전중 군사작전에 도입되었지만 정면 충돌은 없었고 6.25전쟝에서 비로소 제트기가 공중전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11월 8일 압록강 인근인 신의주 상공에서 첫 번째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의  F-80 슈팅스타 제트기와  중국 기지에서 발진한 소련 조종사들이 조종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소련제 제트기인 미그-15기가  정면 대치했다.

6. 미국은 결코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

1950년에서 1953년 사이에 한반도에서는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은 기술적으로 ‘치안 활동’중의  사상자였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미국 의회만이 다른 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없었다.

1950년 북한이 침공했을 때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16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군을 보냈다. 트루먼은 의회로부터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받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한국 주둔은 '치안 활동'을 위해서 였다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에 나와 있다.

미 하원 웹사이트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코소보 전쟁 등 미군은 모두 의회의 군사력 사용 승인 아래 전투에 돌입했다. 이 웹사이트는 "한국전 이후 의회의 군사력 사용 승인(AUMF)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행해졌고, 종종 미국 대통령에게 세계에서 교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선례가 되었다"고  밝혔다.

※참고

The US Army once ruled Pyongyang and 5 other things you might not know about the Korean War(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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