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하는 삶은 왠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울 것 같고, 그래서 협동조합은 피로감이 높은 기업이 아닐까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올시다. 우리의 삶 자체는 협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협동에 균열이 생기면 불건강해집니다. 물론 협동에는 다소 훈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체를 생각해보세요. 각 기관은 매우 긴밀하게 협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기관이 과도하게 사용, 즉 ‘오버’하면 병이 납니다. 모두 적절한 수준에서 협력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자율신경계처럼 그 자체로의 협동도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몸치들처럼 일정한 훈련을 해야 손발이 자연스럽게 협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 저와 함께 몸치 탈출을 시작해봅시다. 온 몸이 협동하는 자유를 만끽해봅시다. 슬기롭게~

 

협동조합 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 말미에 수강생 한 분이 살며시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협동조합이라는 게 같이 잘살자는 것인데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협동조합에 적합한 성향이나 성격을 지닌 사람이 따로 있지 않을까요?”

“여럿이 모여 무언가를 오래도록 같이 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래도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정의감이 강한 사람, 타인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협동조합이란 조직에는 더 잘 어울릴 수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다른 수강생 한 분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강의하는 내내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협동조합이라는 게 특별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조직이라 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허 이런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불연 듯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동경대전에 나오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이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불연(不然) 즉 아니다 기연(其然) 즉 그렇다. 협동조합은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협동조합에 어울리느냐고 하면 그것이 또 그렇습니다. 누가 들어도 앞뒤가 맞지 않고 모순된 말장난 같습니다. 중언부언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오묘하게 이 말장난이 이치에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좋은 성향, 나쁜 성향으로 분류하는 것들이 따지고 보면 뿌리가 같습니다. 걸핏하면 버럭하여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불의 기운이 넘치는 탓입니다. 그런데 불의를 보면 주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칭송을 받는 정의로운 분들도 보통 불의 기운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나쁜 성향의 ‘버럭이’나 좋은 성향의 ‘용감이’ 모두 근본적으로는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냉철한 분석력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런 분들과 매사 냉소적이고 회의적이며 쌀쌀맞은 분들도 그 바탕의 에너지는 같습니다. 쇠 즉 금속의 에너지를 똑같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료들을 두루 잘 챙기고 보듬는 분과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소위 있는 자리에서 뭉개는 분들의 에너지도 같은 것이고요. 거침없이 난관은 돌파하여 길을 열어가는 분들과 다른 직원들을 달달 볶아 소진시켜버리는 ‘갑질 남녀’의 에너지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인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관계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우리의 입을 기계에 비유해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우리의 신체 ‘입’은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는 말하는 기계, 음식과 만나면 먹는 기계, 기도와 연결되면 숨 쉬는 기계가 됩니다. 주방용 칼도 음식을 준비하는 분의 손에 있을 때는 요리하는 기계가 되지만 강도의 손과 만나면 흉기가 되겠지요.

이처럼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우리가 어떤 인연 속에, 관계의 장에 있느냐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성향은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몬드라곤의 호세마리아 신부님이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기업으로서 노동자협동조합을 말씀하였는데요. 여기서 ‘평범한’의 의미는 협동조합기업 경영에 ‘적합한’이란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때로 잘못된 성향들이 그들의 본래 모습이 아니란 뜻입니다. 오랜 실직이나 빈곤, 부당한 임노동 관계,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 등 왜곡된 관계의 장이 그들의 에너지를 비틀어 버린 것이란 점을 신부님은 꿰뚫어 보았습니다. 실제로 노동자협동조합은, 다시 말해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의 장은 협동조합 경영에 적합할 것 같지 않았던 가난한 동네의 평범한 청년들을 위대한 사회적기업가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랜 실직이나 빈곤, 부당한 임노동 관계,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 등 왜곡된 관계의 장이 그들의 에너지를 비틀어 버린 것이란 점을 호세마리아 신부님은 꿰뚫어 보았습니다.

평범한 이들이 지금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다양한 성향들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가 ‘버럭이’ 또는 ‘소심이’가 된 것은 살아오며 일그러진 관계의 장 속에서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에너지 즉 불의 기운, 물의 기운, 쇠의 기운 등은 좋은 관계의 장에서 지금과는 다른 성향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좋은 관계 즉 우애의 관계 속에서 불의 기운은 동료를 지키는 용기로, 물의 기운은 보살피고 돌보는 마음으로, 쇠의 기운은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지혜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좋은 관계의 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성향들마저 긍정적인 기능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약자들에 대한 폭언이 아니라 부당한 외압과 폭력 앞에서 당당하게 버럭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뭉개는 것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시기를 묵묵히 견디어 내는 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협동조합에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협동조합은 우리 마음에 컨버터를 달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외적 성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에너지를 새롭게 발현시켜 줄 컨버터 즉 에너지 변환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게 됩니다. 비단 협동조합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친목회나 독서모임, 봉사단체나 여행 동아리 등 선한목표를 지닌 민주적인 공동체라면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여 그 관계의 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여러분 내면의 불의 기운, 물의 기운, 쇠의 기운이 지금과는 다른 스위치를 켜라고 속삭여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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