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 시위자를 검속하는 일본경찰./사진=장석흥 교수

융희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는 장례 행렬이 지나는 연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 30분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동묘 등 여덟 곳에서 연차적으로 일어났다. 연도에 배열해 있던 학생들이 준비한 ‘격문’을 힘차게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을지로 부근에서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 이어 동대문 앞에서는 일본군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며 70~80여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 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5백~6백여 명에 달했고, 현장에서 붙잡힌 학생도 2백여 명이 넘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철통같은 감시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장 놀란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7년 전 3·1운동으로 총독이 파면되고, 식민지 통치 방식을 수정할 만큼 충격을 받았던 일제는 융희황제 승하 전후 3·1운동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압적 탄압으로 민심을 억눌렀다. 본디 쇠약했던 융희황제는 1926년 2월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고, 일진일퇴의 용태를 거듭하다가 4월 25일 오전 6시 승하했다. 이 동안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처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서울 시내를 포위하고, 무장시위를 감행하는 등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4월 23일에는 돈화문 앞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일경·기마 순사·헌병 2백여 명을 배치하는 한편 3·1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에는 중무장의 기관총 소대를 배치하며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만일에 대비해 각도에서 3천 5백 명의 경찰을 차출하고, 헌병대사령부는 나남, 함흥, 평양 등지에서 헌병을 동원해 비상경계에 나섰다. 인산일 당일에는 인도에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물샐틈없는 경계를 펼쳤다. 

그런 경계와 감시망을 뚫고 일어난 것이 인산 당일의 만세운동이었다. 일제의 충격은 조선총독부를 넘어 일본 본국으로까지 파급됐다.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조차 6·10만세운동이 그간의 식민지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조선총독부를 질타했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그 뿌리까지 찾아 관련자들을 ‘엄벌’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5, 6백 명의 학생을 모두 구속 조치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그렇게 될 경우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만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며, 결국 11명의 학생만 재판에 회부하며 ‘사건’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리고 6?10만세운동을 계획·추진했던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계열의 인사들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만세운동과 별개로 처리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융희황제 인산일에 울분과 감정을 이기지 못한 소수의 학생들이 ‘감상적’ 민족의식에 빠져 일으킨 만세소요로 ‘사건’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6·10만세운동에 대한 왜곡은 안타깝게도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6·10만세운동의 역사상을 세울 수 없었다.

6.10만세운동 재판(1926년 11월 3일)./사진=장석흥 교수

융희황제 승하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계는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추진해 갔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병인의용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국내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 학생 단체 등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조직적 연대를 이루며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운동의 최초 계획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구상됐지만, 임시정부와 병인의용대가 연결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천도교의 전국적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 및 지방 연락을 맡기로 했으며,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선봉에 나서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리고 6·10만세운동의 총본부인 ‘대한독립당’은 종교계, 사회주의, 민족주의, 학생, 청년 등의 세력을 망라한 명실공히 민족협동전선체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6·10만세운동 계획이 거사 직전 6월 7일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계열의 조직이 파괴되고 말았다. 위기 상황에서 체포망을 피한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추진되었으니,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가 그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의 지도부는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선언서인〈격고문〉에서도 3?1운동을 만세운동의 시원(始原)으로 표명하듯이,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그렇다고 6?10만세운동이 3·1운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3?1운동과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3·1운동 때와는 다른 정세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운동이 1차 대전 후 인도주의가 부상하면서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지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처지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만큼 6·10만세운동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3·1운동이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만개한 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혹독한 추위를 뚫고 피어난 인동초와 같은 것이었다.
  
운동의 주체들도 3·1운동 때와는 세대를 달리했다. 3·1운동에서 전위를 담당했던 학생계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중심 주체로 나선 것이다. 그에 따라 운동의 이념도 다원해졌다. 3?1운동의 지도 이념이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독립으로 모아지면서 이념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3·1운동에서 종교 이념을 초월했다면, 6·10만세운동에서는 정치 이념까지 초월하는 민족 통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계의 통합은 1920년대 후반 민족대당촉성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1926년 7월 상하이에서 안창호는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민중의 통일기관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족대당촉성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1926년 7월 임시정부에서는 국무령 홍진이 취임식에서 ‘전민족적 당체(黨體) 조직’을 3대 정강의 하나로 제시하며 독립운동계의 통합적 지향을 내보였다. 독립운동 통합의 물결은 만주까지 확산돼 3부의 독립군을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성립의 직접적 배경이 됐다. 독립운동에서 민족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최고의 방략이자 가치였다. 그런 점에서 6·10만세운동은 최고의 방략과 가치를 실천한 독립운동의 첫 이정표였다. 

순종국장 광경 엽서-대여(大與)./사진=장석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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