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에 충주 시내로 나가는 시외버스가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덕산면 글쓰기 모임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정보였다. 한 사람이 자신은 처음 알게 된 정보라며 사진을 올렸고, 충주로 가는 버스가 하루 여덟 대에서 두 대로 줄었다고 말했다.

사진을 눌러 확대해 보니 ‘덕산 정류장 직행 버스 시간표’ 충주 방면, 단양 방면이라고 쓰인 글자 아래로 엑스 표시가 쳐져 있었다. 이 난감한 버스표가 내게는 이렇게 읽혔다.

충주 방면 7:40 버스 없음, 9:35 버스 없음, 12:10 버스 없음, 13:30 버스 없음, 15:30 버스 없음, 17:10 버스 없음. 네가 덕산을 떠나 장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는 오전 10시 20분, 오후 7시 30분 두 번뿐임. 네가 덕산 집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임. 오후 5시 25분, 8시 10분이 아니면 집에 돌아갈 자유는 없음.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바이러스 시대를 맞이할 때, 확진자가 없는 제천시 덕산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한적한 마을길에서도 꼭꼭 마스크를 꼈고, 하나뿐인 우체국에는 마스크를 구하려는 주민들이 긴 줄을 섰다. 하나뿐인 약국에 마스크가 동나는 건 물론이고, 내가 일하는 기숙형 대안학교와 덕산초중학교는 오프라인 개학을 하지 못했다. 정부 권고 수칙이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면서 덕산초중학교도 마스크를 낀 입학식을 겨우 치뤘다지만, 코로나19를 겪은 뒤 인간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단지 ‘정상화’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편하게 입고 먹던 삶, 먼 지역과 나라로 너무 자주 이동하던 삶, 기존 공공의료와 방역 체계에 기대던 삶을 바꿔낼 가장 적절한 타이밍인 것이다. 우리 삶을 멈춰 세운 코로나19라는 사건은 익숙하게 여겨온 개발 문명을 돌아보라고 요구한다. 또한 그 시선은 더 낮은 곳에, 더 약한 곳에 머물러야 할 거라고,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이야기한다.

말도 안 되게 적은 버스 시간표에 통탄할 무렵,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약 두 달 만에 생긴 덕산 바깥 약속이었다. 평일 약속이라 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는 당일로 다녀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자고 갈까 했지만, 충주에서 안산으로 향하는 시외버스 역시 두 대로 줄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다. 

핸드폰 어플을 켜 놓고 적어도 열 가지 이상 왕복 경로를 고민했다. 1. 안산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면 충주역을 통해 수원역으로 간다. 2. 또는 광명역으로 간다. 3. 단양을 거쳐 서울을 통해 안산으로 간다. 4. 당일에 충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간다. 5. 당일에 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간다. 돌아올 때 시내, 시외버스가 끊긴다면 ①충주에 아직 안 친한 지인 집에서 잔다. ②충주 찜질방에서 잔다. (코로나19 시대에?) ③염치없이 태우러 나와 달라고 부탁한다. ④(약 3만 원 택시비를 지불하고)택시를 타고 들어간다. ⑤그냥 당일에 안 돌아간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버스 운행이 줄었다./사진=김예림 前 월간옥이네 기자

수많은 이동 경로를 따져보고서야 애초에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정해진 약속 시간에 도착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는 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충주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 돌아오는 것. 다른 하나는 아예 약속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다.

약속 당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씻으며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읽었다. 어느 쿠팡맨은 과로사 했고, 바이러스 시대에도 일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집단 감염됐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됐다. 살 길이 막막해진 자영업자와 마찬가지로 무급휴직을 권고받는 회사원 인터뷰를 읽었다. 최대한 대중교통 이용을 자제하고 자차를 타자는 글도 눈에 띄었다. 광고란에는 어느 버스회사가 코로나19로 급감한 승객 때문에 버스 편이 줄고 월급을 주기 어려워졌다며 정부 지원을 요구했다. 그 어디에서도 자차 없이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제천 시내로 향하는 아침 7시 25분 버스에 오르면서, 제천에서 증평-청주-천안-수원-서울로 빙빙 돌아가는 기차를 타면서, 서울에 최대한 오래 있고자 막차를 탈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기다렸다 초조하게 터미널로 뛰어가면서,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덕산에 도착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면서, 꼬박 10시간을 이동한 피곤한 몸을 뉘이며 생각했다. 이건 지역의 이동권 문제구나. 

바이러스 이후의 삶을 상상해야 할 학생들에게, 코로나19를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 중 어떤 것을 전하면 좋을까? 학생 없는 학교에서 진행한 코로나19 교사연수에서 교사들은 각자 다른 답을 내놨다. 각종 루머와 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짚어야 한다는 사람, 짙은 혐오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평소 잘 신경 쓰지 않았던 바이러스 예방과 안전수칙 강화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자가격리가 어려운 장애인이나 방역망에 잡히지 않은 판자촌, 청도대남병원 등 공공의료체계와 방역체계가 미처 닿지 않는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확실히 충주로 병원을 다니는 어르신은 충주의료원이 폐쇄되고 시외버스편이 줄어들면서 병원에 갈 방법이 없어졌다’고, 또 ‘나이 들수록 다양한 계층의 정보소외가 곧 내 일이 될 것 같다’고. 

남 일이 아니라는, 편협한 위기감이 나를 생각하게 한다. ‘원래 그런 것’은 어떤 체계를 견고히 하기 위함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 내 덕산 살이는 산골짜기 마을에서도 각종 모임과 만남으로 숨 가쁜 동시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대부분인 일상이다. 매일, 매 순간이 판단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하는 내가 채워나가야 할 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목록의 첫 번째로 ‘원래 그렇다’고, ‘어쩔 수 없다’고 너무 자주 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본다. 이건 바이러스 시대 지역 이동권에 대한 요구가 어쩔 수 없음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내가 생각하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에서 견지해야할 시각이다. 더 쉽게 말해볼까. 나는 최소한으로 보장된 이동 수단이 주는 서울에 갈 자유, 안산에 갈 자유, 덕산에 돌아올 자유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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