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분노의 포도'의 한 장면.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미국의 대공황기에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한 가족의 인생유전을 그린 대 서사시다. 극심한 가뭄과 오클라호마 대평원에 불어오는 모래 폭풍에 농사를 망친 소작인 조드 일가는 기계 영농을 시작한 지주로 부터 쫒겨나 ‘축복의 땅’ 캘리포니아로 길을 떠난다. 

작렬하는 태양아래에서 사막을 횡단하고 산맥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다달은 그곳도 지상 낙원이 아니었다. 이미 뿌려진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실업자들로 넘처났다. 간신히 얻은 일자리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근근이 생명을 부지하다가 "너 말고도 일할 놈 많다"는 농장주의 갑질과 혹사에 견디다 못해 폭동을 일으키고 도주한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찾아 들어간 허름한 빈집, 그 헛간에서 만난 굶어 죽어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는 ‘샤론의 장미’라는 애칭을 가진 톰 조드의 누이가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은 절망속에서 휴머니즘의 극치였다.

1920년대에 미국은 엄청난 부존자원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불과 수년 만에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1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 국가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1927년 이르러 미국 경제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았지만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것이 계층 간 소득 불평등이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으로만 흘러들어가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상류 부유층이 전체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대다수 국민들은 구매력이 없어 공장에는 재고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자금은 투자처를 찾지 못해 점차 증권 등 투기 시장으로 모이면서 주식 시장에 거품현상이 나타났고 주가가 상승하면서 더 많은 돈이 증권 시장으로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증권 시장의 과열로 주가 폭락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드디어 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는 '파탄'으로 이어졌고 기업과 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경제 전체가 붕괴하는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TVA)법안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대한민국정책브리핑

대공황은 인간이 무한대 욕망의 충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대공황이 절정에 달한 1933년에는 실업자 수가 1,500만 명에 육박했다. 생산을 따라가지 못한 유효수요의 부족이 대공황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이유였다. 연일 상종가를 기록하는 주가를 즐기고 있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의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고 거리 여기저기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거지 아닌 거지들이 즐비했다. 영원히 번영할 거라고 믿었던 자본주의 경제가 한 순간에 물거품 처럼 꺼저 버렸다.

공장 창고와 상점에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가고 있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소득을 올리기 위해 기업농으로 생산을 늘렸으며 이는 또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졌다. 농산물은 조금만 과잉 생산되어도 가격이 폭락하고 조금만 생산이 부족해도 가격이 폭등하는 경향이 있다. 가격이 폭락하자 농민들은 밭을 갈아 엎거나 수확물을 불태워 버렸다. 그렇다고 정부가 남아도는 농산물을 매입해 도시 실업자와 빈민에게 나누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간상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이미 빈곤에 빠져 있던 나라들은 공황의 충격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최고의 풍요를 누리던 미국인들에게는 차라리 죽기보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대공황의 경험은 자유 자본주의의 근간을 뿌리 채 뒤흔들었다. 이에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즈를 비롯한 수정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사회 보장법을 시행하여 고령자, 실업자, 장애인을 위한 사회보험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취로 사업청을 설치하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대공황은 결국 그가 내건 '뉴딜 정책'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 정책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으며, 이후로 정부의 시장 개입은 자본주의 경제의 거역할 수 없는 원리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뉴딜 정책의 요체는 '구제와 부흥' 이었다. 민관 협동체제하에서 농공산품의 생산을 제한해 가격의 안정을 꾀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과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려 실업을 해소하고 민간 구매력을 회복하여 소비재 생산을 자극했다. 이를 위해 대규모의 공채를 발행하여 공공사업에 투입하여 멈추었던 기계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5년에 이르러 뉴딜 정책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효수요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통화가 과잉공급된 나머지 인플레로 이어졌다.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이번에는 다시 긴축예산으로 급선회 하다보니 회복기에 들어섰던 경기가 곧바로 붕괴되어 1937년에 제2차 공황이 발생했다. 이에 고용촉진 사업과 공공사업 확대, 신농업 촉진법 실시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동시에 노사 대립의 격화를 막기 위해 공정노동기준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던 중에 국제 정세가 악화되고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 경제는 급속히 전시경제 체제로 전환되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바이러스가 나타나 세상을 분탕질하며 그때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전례 없는 위기가 닥칠 것으로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는 저마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나라 곳간을 털어 나눠주는 긴급 재난기금은 언발에 오줌누기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서 벤치마킹할 거리를 찾고 있지만 경제의 규모와 패러다임이 크게 변했기에 그 정책이나 케인즈의 이론이 비책이 될것 같지도 않다. 개인적 자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정부의 강력한 개입은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혼돈과 또 다른 심각한 모순을 불러올 위험이 따른다. 지구공동운명체의 지속 가능한 공존 공영을 위해서는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여 인류애와 자연애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업 활동은 이윤의 극대화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가치창출의 극대화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가난은 자원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낭비하고 고르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날 저무는 빈들녁에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게 했다는 성경속의 이야기는 나눔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물이 저수지에 고여서 아래로 흐르지 않으면 가뭄이 들고 기근이 일어난다.  이웃을 배려하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내어주어 약자를 돕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향기가 넘처나는 사회, 그리하여 질서 있는 공동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소망한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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