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기록화./사진=장석흥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북간도에서 삼둔자전투에 이어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며 독립전쟁사에서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거기에는 독립군의 전설적 ‘영웅’, 김좌진과 홍범도가 있었고, 2천여 명의 병력으로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물리친 승전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의 독립군을 기억하는 것은 왠지 익숙지 않다. 독립군 전투사를 보면, 일본군과 싸워 이긴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천여 차례에 걸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대부분 패했고, 그 과정에서 수천여 명의 독립군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열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막강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힘으로 따지면 애초 독립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패하고 또 패해도 독립군은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독립전쟁을 이어갔다. 그들에게는 싸워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독립의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한 꿈과 투혼만이 있을 뿐이었다.  

독립전쟁은 독립운동의 최고의 방법과 전략이었다. 1920년 전후 서·북간도와 연해주에는 5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활동하고, 독립군의 병력도 1만 여명에 달했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의 군인은 고작 7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제 침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갔던 것이 대한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3·1운동 직후 1만 여명의 독립군이 생겨나며 독립전쟁을 전개해 갔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순수 민병(民兵)이었다. 자발적으로 독립군에 나선 이들은 무기를 비롯해 생활까지 스스로 해결하면서 독립전쟁을 벌여 나갔다. 이는 진정한 한국 독립운동의 힘이었다.   
  
그러면 독립군은 어떻게 생겨났던 것인가? 독립전쟁의 승전을 따지기에 앞서 독립군의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독립군이 형성되는 경로와 갈래는 다양했다. 

먼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한 경로이다. 1894년 의병에서 비롯한 무장투쟁은 1910년대 대략 세 갈래로 분화되어 갔다. 3·1운동 때까지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간 경우, 대한광복회(1915)와 같이 혁명적 활동을 전개한 경우, 홍범도처럼 해외로 망명해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독립군으로 재편·발전한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한 사례는 서간도의 대한독립단, 북간도의 경성의병 등에서도 찾아진다. 역사적으로 전통적 의병과 근대적 독립군은 그렇게 이어졌다. 

두 번째, 계몽운동 계열의 신민회가 해외 독립군기지를 개척한 경로이다. 1907년에 설립한 신민회는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광무황제(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 망국의 위기에 처하면서, 의병의 무장투쟁을 수용하며 독립전쟁 방략으로 전환해 갔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였다. 1911년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며,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로군정서의 근간을 이뤘다.  

세 번째, 북간도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군을 형성한 경로이다. 3·1운동 무렵 북간도 지역에는 한인의 수가 50여만 명에 달했다. 당시 해외 한인사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이 곳은 간민회와 같은 한인자치단체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민족교육을 통해 성장한 청년들이 후일 독립군에 참가한 것이다. 대한국민회의 국민회군은 북간도 한인사회를 모태로 생겨날 수 있었다. 국민회군은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 참가해 승전의 주역이 됐다. 홍범도가 북간도를 무대로 활동을 폈던 것도 북간도 한인사회가 밑받침을 이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 번째, 종교계통 인사들이 독립군을 조직한 경로이다. 북간도 지역에는 대종교, 개신교, 천주교 등 종교가 일찍부터 전파됐다. 대종교에서는 1911년 중광단을 설립했다가 1919년 대한정의단으로 개편 후 다시 북로군정서로 통합 발전시켜 나갔다. 개신교도들은 훈춘의 대한신민단과 한민회를, 천주교인들은 왕청에 의민단을 설립했다. 대한신민단은 1910년대 훈춘과 연해주 등지에 대한기독교회 및 대한성리교 신자 3만여 명의 신자들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독립군 형성에는 이처럼 종교적 기반도 크게 기여했다.   

다섯 번째, 북간도의 민족학교들이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 됐다. 1906년 서전서숙을 효시로 뿌리를 내린 한인의 민족교육은 1917년 무렵 한인 학교가 80여 개에 달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당시 교육의 중심지 용정에는 많을 때 학생 수가 전체 인구의 40%나 차지하면서, 학생들로 거리가 넘쳐날 정도였다. 한인의 민족학교는 저마다 군사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군 훈련소의 역할을 맡았다. 창동학교와 명동학교 출신들로 구성된 철혈광복단은 그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영농 광경./사진=장석흥 교수

여섯 번째, 1910년대 사관학교와 무관학교 등에서 독립군을 배출하고 있었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연해주의 사관학교 등과 함께 북간도에는 동림무관학교와 그의 후신인 북일학교 등이 있었다. 1914년 이동휘가 세운 동림무관학교는 북간도 각지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와 2백여 명의 규모로 발전했으나, 일제와 중국 당국의 탄압으로 폐교한 뒤 1917년 훈춘으로 옮겨 북일학교로 재탄생했다. 4년 동안 2백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북일학교는 훈춘의 군무부, 철혈광복단, 한민회, 대한독군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북간도 독립군 창설의 근간을 이뤘다. 

일곱 번째, 국내 비밀단체가 독립군으로 전환해 간 경로이다. 3·1운동 직후 국내에는 200여 개에 달하는 비밀단체가 생겨났다. 이들 비밀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만주 독립군에 대한 지원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 탄압이 극심해지자 근거지를 만주로 옮겨 독립군 조직에 가담했다. 그 사례는 서북의 대한국민회 지부 조직이나, 대한독립청년단과 함경도의 함경도청년의용대, 대한독립군 국내 지단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독립군 형성의 경로와 갈래는 마치 실개천이 모여 대하를 이루는 형상이었다. 독립전쟁은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독립군의 형성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독립군도 싸우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자고, 입고 또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재정적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어쩌면 독립군의 재정문제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과 시련이었을지 모른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독립군 가운데는 재정적 문제로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2020년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다.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독립군의 역사가 아직도 잠자고 있는 것은 분명 우리의 잘못이다. 독립전쟁에서 이긴 것만이 아니라 싸워서 진 것도 영광스럽고 숭고한 가치를 지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싸워서 이긴 것만을 쫓다 보면, 자칫 힘의 논리에 빠져 독립전쟁이 실패한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독립군의 힘으로 일본군을 물리쳤어야 진정한 광복’이라는 일본의 식민 논리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바로 서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명의 독립군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사진=장석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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