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비커'에서 3D 콘텐츠로 제작한 '코로나19(COVID19)' 모형. 사용자가 색상, 투명도, 크기, 방향 등을 수정해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내려받을 수 있다./사진제공=블루비커

“외피가 돌기로 둘러싸인 ‘왕관(Corona)’ 모양이라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2020년 현재,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모양 때문에 코로나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외피가 돌기로 둘러싸인 왕관’이라는 설명만으로 코로나19의 구체적 모양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후 현미경 사진이나 일러스트 이미지 등으로 형태가 알려지면서 누구나 쉽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모양이 어떤지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메디컬 일러스트’는 의학과 생물학 분야에서 효과적 정보 전달을 위해 만든 콘텐츠를 말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구조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시각화해 교육·연구·개발·홍보 등에 사용하는 것이다. 소셜벤처 ‘블루비커’는 메디컬 일러스트를 만드는 스튜디오에서 출발해 지난해 9월 제작과 유통을 겸하는 회사를 세우며 사업을 시작했다. 임팩트 투자사 ‘소풍(SOPOONG)’에서 투자를 받고, 설립 6개월 만에 매출 6천만원을 올리는 등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의사 꿈꾸던 유학생…‘메디컬 일러스트’ 전공해 스타트업 설립

권우혁 블루비커 대표가 임팩트 투자사 SOPOONG 데모데이에서 기업의 활동 내용과 성과를 발표하는 모습. 회사명 '블루비커'는 권 대표가 대학 연구실에서 인턴십을 할 때 처음으로 그린 '비커'에 설계도를 뜻하는 '블루프린트'의 색깔을 더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제공=SOPOONG

블루비커는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서 ‘바이오·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는 4학년생 권우혁 대표(28)가 설립했다. 한때 의사를 꿈꿨던 권 대표는 교육용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유학 초기 영어가 서툴러 교과서 속 그림에 더 눈길이 갔고, 도미니카공화국·인도 등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현지 사람들과 언어보다 이미지로 소통하는 게 도움이 되는 등 경험을 하며 시각적 콘텐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미국·캐나다·유럽 등에서 메디컬 일러스트는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전공이다. 권 대표는 “학부에서 미술·생물·컴퓨터공학 등을 다양한 영역을 공부하고, 동물해부학을 배우거나 카데바(해부용 시체) 실습을 하기도 한다”며 “자연과학대학 소속 전공이기 때문에 미술보다는 생물학을 중심으로 하고, 이를 각자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 학생마다 선택하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전공 수업 중 로키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생동물의 그림을 그리는 과제가 있었는데, 당시 권 대표는 산양의 뿔을 선택했다. 뿔의 앞모습뿐만 아니라 옆·뒷모습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컴퓨터 3D 프로그램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막상 과제를 제출하려고 하니, 교수님의 컴퓨터에 해당 프로그램이 없으면 보여줄 수가 없었다. “특정 프로그램을 깔지 않고도 브라우저에서 3D 콘텐츠를 마음껏 볼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웹GL(Web Graphic Library)’ 기술을 기반으로 3D 모델 열람 자체 뷰어를 개발했다. 권 대표는 지난 7일 블루비커에서 웹GL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3D 모델 검색 플랫폼을 출범했으며, 뷰어는 특허 출원을 준비 중이다. 저작권이 확보된 고품질 2D 이미지부터 신체 장기·세포 등 인체 3D 모델 등 원하는 콘텐츠를 보다 쉽게 구할 수 있다.

# 연구자 시간·비용 덜고, 고품질 콘텐츠 제공해 성과 높여

4월 7일 '세계보건의 날'을 기념해 출범한 '블루비커' 홈페이지 화면. 메디컬 일러스트와 다른 일러스트의 차이는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함'이 중요하다./사진제공=블루비커

사실 메디컬 일러스트는 연구자 입장에서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콘텐츠’로 인식돼왔다. 논문이나 자료에 넣을 특정 이미지가 필요하지만 마땅한 그림이 없어 구글에 올라온 저화질 이미지를 내려받거나 연구원 본인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비전문가가 그리다 보니 시간 투자 대비 ‘안타까운 그림’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불필요한 수고 대신 전문 작가나 스튜디오가 제작한 고품질 그림을 찾아 구입하거나 맞춤형 콘텐츠를 주문 제작하고,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원하는 색상·채도·방향·크기의 이미지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권 대표는 “연구자들이 오직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면서 “메디컬 분야는 장기·세포·수술도구 등 사용하는 이미지가 한정적이라 연구자들이 찾는 웬만한 모델은 다 있을 정도의 라이브러리를 구축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8년 인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 ‘메디컬 일러스트’ 교육과정이 최초로 개설됐다. 학부에서 회화·조소·간호학·생물학 등을 전공한 학생 15명이 공부 중이다. 블루비커는 지난 3월 가톨릭대와 파트너십을 맺어 공동 연구를 하고 있으며, 대학원생들이 그린 일러스트를 블루비커 오픈마켓을 통해 판매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비롯해 서울아산병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등에 메디컬 일러스트 ‘베타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향후 각 학교나 기관을 위한 전용 페이지를 열어 소속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이미지를 열람하고 활용하는 구독 서비스로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 하반기 글로벌 진출 목표…코로나19로 분야 확장 가능성도

'블루비커'는 의학, 생물학 등 분야 교육 및 연구에 필요한 메디컬 일러스트를 제작·유통·중개한다. 현재 200장 이상의 콘텐츠가 올라왔고, 가격은 무료부터 수십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사진제공=블루비커
'블루비커'는 의학, 생물학 등 분야 교육 및 연구에 필요한 메디컬 일러스트를 제작·유통·중개한다. 현재 200장 이상의 콘텐츠가 올라왔고, 가격은 무료부터 수십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사진제공=블루비커

블루비커는 설립 때부터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뒀다. 올 하반기 메디컬 일러스트 분야 선두 주자인 미국을 시작으로, 호주·태국 등 메디컬 분야 지출 규모가 큰 시장으로 확장을 시도할 계획이다. 권 대표는 “웹GL 기술이 쇼핑·게임 분야에 적용된 적은 있지만, 메디컬 일러스트와 접목한 건 블루비커가 처음”이라며 “사용자가 웹사이트 주소만 받으면 어떤 기기로든 쉽고 빠르게 고화질로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웹GL 기술은 의학·생물학을 넘어 교육·건축·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학교 수업을 비롯해 각종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실제 코엑스에서 열리기로 한 바이오 박람회가 온라인에서 진행되자, 한 보건 업체에서는 블루비커에서 3D 콘텐츠를 만들어 제품을 홍보하기도 했다. 향후 글보다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수업이 보편화하면, 마치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교과서처럼 움직이는 3D 콘텐츠로 공부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게 권 대표의 생각이다. 

“어려운 길을 찾아야 할 때, 인공위성 사진이 아니라 지도나 약도를 보고 가잖아요. 블루비커가 하는 일은 약도를 그려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거라고 생각해요. 메디컬 일러스트를 통해 연구자와 수용자가 어려운 정보를 좀 더 쉽게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의학·생물학 분야에서 의미 있는 연구가 나와도 세상에 닿지 못하고, 학회 안에서만 머무는 경우가 많거든요. 멋진 기술들을 세상과 더 많이 연결해줄 수 있는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