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에 넋 잃는 동안에도 붓두껍 놀릴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투표용지에 찍힌 수많은 정당 기호들보다 할 말이 더 많겠지만, 이번 총선에서 붓두껍으로 선택할 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욕구)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될 듯한 후보를 골라내려고 합니다.

이해관계라고 해봤자 단순합니다. 가진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불리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내 수중의 돈이 넉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모자라는 것보다 넘치는 것이 항상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즐거움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자와 가난뱅이가 함께 식사하면 항상 가난뱅이(아닌척하는)가 셈을 치르게 마련입니다. 나는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재산을 불려나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득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머지는 거의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작은 노력으로도 크게 보상받는 것은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은 재산을 불리는데 필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특혜와 제도, 법 등의 편의를 제공해줍니다. 끼리끼리 밀고 당겨주는 관계망도 형성됩니다. 일단 기득권에 진입해 조그만 권력이라도 쥐게 되면, 나머지 욕구들은 덩달아 쉽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엄청난 열망을 가진 (나 같은) 인간들이 가득합니다. 권력의 유일한 목적이 타인의 욕구에 맞서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자는 기득권 바깥의 덜 가진 자의 몫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도 대중매체를 통해 약탈자가 아닌 시혜자의 프레임을 짜서 선전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덜 가진 자들은 자신의 몫을 빼앗아간 부자들만큼 잘 살게 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데도 부자들을 추종하고 지지하게 됩니다.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얼치기 지식인들은 기득권 바깥의 서민들을 구조적으로 갈취하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을 지대추구자(rent seeker)로 규정하고 비난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놓고 말하긴 뭐해도, 나도 지대추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돈과 힘을 가진 기득권의 강고함은 단연 우리사회가 세계최고이니까요. ‘가난’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사회의 시스템이 가난한자들의 몫을 부자들이 착취하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매일 아침 들여다보는 신문 하나만 가지고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신문(주류신문의 구독)을 좋아합니다. 첫째, 구독하면 현금을 받습니다. 독자가 구독료를 내고 신문을 보는 게 상식이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사회에서는 신문사가 독자에게 돈을 쥐어 줍니다. 예전에는 상품권이나 자전거, 가전제품 따위가 사은품이었는데, 요즘은 무조건 현금으로 줍니다. 물론 구독료도 무료이고 덤으로 경제지나 스포츠지도 끼워서 배달해 줍니다. 1년 무료구독 기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구독료를 내느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른 가족이름으로 명의를 바꾸고 또 현금을 받으시라고 꿀팁을 줍니다. 내가 원하는 한 몇 년이고 현금을 받아가며 무료로 구독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근심이라면 혹시 다른 신문사가 더 많은 현금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여러분 중 신문을 보고 있으면서 현금을 받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신문사가 지역차별(못사는 동네는 액수가 적거나 아예 안주기도 합니다)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창간 100년이 되었다거나, 자칭 일등지를 구독하고 계시다면 적지 않은 액수이니 반드시 확인해 보세요. 아무튼, 신문구독료 공짜에 덤으로 현금도 주고 자매지까지 1+1으로 주니 신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돈까지 주는 신문이 내게 ‘생각하는 능력’도 키워준다는 점입니다. 신문은 그들이 애기하는 진실의 이면(대부분 이쪽이 진짜 진실입니다)을 엿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교재입니다.(진심으로, 신문은 내게 너무도 크고 소중한 능력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앞서가는 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남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신문 봐주는 대가로 받는 돈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문사는 내게 주는 돈 외에도 제작과 유통 등에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누군가’로부터 갹출(醵出)하여 충당합니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 ‘누군가’는 지대추구자, 그러니까 이른바 자본가와 정치·경제 엘리트(당연히 지배계급입니다)입니다. 

과거에는 언론이 독자를 ‘바보’라고 상정하고 가르치고 교화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제는 독자를 ‘숙주’로 여기는 듯합니다.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도 사라집니다. 숙주가 죽지 않게 돈을 쥐어주는 이유입니다. 신문은 그들이 돈까지 쥐어주며 배양하는 숙주를 위한 기사는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재정적 후원자가 원하는 방향이나 취향을 쫓아 기사를 생산하기 마련입니다. 숙주는 자주 이 사실을 착각하거나 망각하여 그들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먹잇감이 됩니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안에서 증식을 거듭하면 세포막을 터트리고 나와 숙주세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덫에 설치된 미끼로는 정치성향에 따라 극단으로 나뉜 신문이 외골수로 주입하려는 진영논리와, 자본을 위해 그럴듯한 기사로 포장된 홍보와 광고가 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업은 아무 일이 없어도 주류신문에 정기보험(정량의 협찬이나 광고)을 들어야 합니다. 이 보험료의 일부가 신문사의 인질, 즉 돈 받고 구독해주는 자에게 지급되는 것입니다. 자본과 권력과 언론이 유착하여 왜곡되고 조작된 정보가 인질에게 주입되는 패러다임입니다. 이 패러다임은 우리의 도덕적 결정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레밍화(Lemming syndrome, 집단 경쟁에 몰입하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현상)된 인질들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레밍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생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은 약간의 의지만 있으면 의외로 쉽게 내면에 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문이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편향되고 조작된 기사를 읽을 때, 그 반대 면을  사고하는 힘을 키우면 어렵지 않게 진짜 진실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대변하지 않고 가진 자의 입장만 앞세우는 기사와, 잘못을 고발하고 해결방법을 찾기보다 호도와 은폐를 일삼는 기사를 분간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공헌을 한 어떤 기업의 오너에 관한 미담기사는 다음과 같이 뒤집어서 해석해야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음, 이 회사는 독과점으로 경쟁 없이 시장을 지배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위험을 외주화하여 쉽게 벌어들인 돈의 ‘눈꼽만큼’을 생색내기 사회공헌에 썼다는 기사로군. 불과 몇 달 전에 갑질, 오너리스크 등으로 두들겨 맞았던 기업인데…. 길들이기 마녀사냥하고 건수 올렸군. 그런데 이 정도 분량이면 얼마를 주었을까, 다른 신문에는?” 

이런 식으로 신문기사를 거꾸로 뒤집어 읽는 습관을 들이면 지대추구자의 세계가 훤히 내다보이게 됩니다. 주류신문이 부리는 교묘한 대중조작과 왜곡·선동(Demagogue)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것들(데마고그)은 지대추구자의 이익을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신뢰성을 얻고, 나아가 착취당하는 자가 착취하는 자를 동정하고 지지하게끔 조작해내는 교활한 장치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경쟁에서 탈락하여 점점 더 가진 게 줄어들고, 적게 버는 계층에게 더 극우적 성향을 갖게 하는 확증편향까지도 제공합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곳도 없는 이 땅의 청춘들을 우경화의 덫으로 몰아가는 몰이꾼입니다. 

하지만 신문이 의도치 않게 부여해준 ‘생각하는 능력’으로 나는 내 붓두껍의 낙점을 받을 후보를 고르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우선 배제해야 할 정치인을 가려낼 능력이기도 합니다. 

가려내야 할 일순위는 자신의 반대자를 포함해 공동체 전체를 대표해 내겠다고 허풍을 떠는 후보입니다. ‘공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주민도 끌어안아야 된다는 입바른 소리가 왜 허풍인지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강남3구 주민들의 표심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강남3구는 빈자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후보만을 줄곧 선택해 왔습니다. 이 곳의 부자주민들은 가진 게 많아 지킬 것도 많은 자기들만을 대표하는 사람이 필요하지(훗날 되돌아보면 그저 허풍투성이 말일뿐인), 가난뱅이와 부자 모두를 똑같이 대변하겠다는 ‘공인의 적성’을 갖춘 사람은 결코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탁월한 선택이 강남3구의 아파트가격을 전국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학력이든 재력이든 강남3구의 주민이 다른 구의 주민보다 못난 점이 있나요? 경쟁을 통해 약자를 탈락시키고 스스로의 학력을 오로지 자기 이익의 확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고, 강남의 학교와 학부모는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더 많이 투자했기 때문에 일류가 되었고, 기득권층이 되었고 또 앞으로도 되어갈 뿐입니다. 

두 번째로 배제되어야 할 후보는 우리의 이해관계보다 ‘가치’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살벌한 세상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를 벗어나려면, 빈곤의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면, 지금까지의 밖으로부터 주어진 가치기준들을 거부하고 나눔과 연대에 의한 관계론의 지혜와 가치를 익혀야 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가소롭지 않습니까? 이들은 ‘인간은 돈으로 움직인다’는 명명백백한 진실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시대에서건 모든 가치가 변화되어도 ‘돈’만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로서 계속 존재해 왔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맥락도 실체도 없는 공허한 ‘가치’를 내세우는 얼간이들입니다. 만약, 우리사회에 보이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가치’라는 게 있다면 ‘돈’이 그것입니다. ‘돈’은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춰 행동합니다. 가치의 사전적 의미가 ‘쓸모 있음’이듯이, 신뢰할 만한 가치는 행복도 살 수 있는, ‘쓸모 있는 돈’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내가 힘들여 번 돈을 왜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자고 합니까?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줄 세금을 왜 내가 내어야 합니까?

이렇듯 배제되어야 할 후보들을 솎아내면 이번 총선에서 선택해야할 나의 이익 대변자이자 정치적 아바타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그는 나의 행동의 동기가 있는 곳, 나의 욕구와 이해관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꿰뚫어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경제적 불안감이 어떻게 인간을 절박한 바보로 만드는지를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과 같이 위기에 처한 사회적 격변기에 우리의 불행을 받침으로 삼아 탐욕스럽게 우리의 표심을 공략합니다. 그는 일자리를 지켜주고 소득을 늘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복잡하고 해결의 가망이 없는 지역공동체의 문제와 갈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총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다./사진=위키백과

‘생각하는 능력’덕분에 우리는 그가 약속한 모든 것들이 실현되려면 창조주만 가지고 있을법한 마법의 힘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이 ‘표’라는 것도 압니다. 그는 공동체의 복잡한 문제(갈등)에 대해 해법으로 내놓은 쉬운 해결책을 믿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실업자들에게는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연대감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며 희망을 약속하는 한편, 일자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일자리를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고 지켜주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약속을 태연하게 공언합니다. 그래야 일자리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를 얌전히 있게 하면서 이들의 표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공동체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개인들의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며 다투는 하나의 마당입니다.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의 어떤 문제도 점점 더 복잡한 것으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그가 내세우는 쉬운 해결책은 공동체의 미래를 점점 더 꼬이게 할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정부의 정책, 예산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게 됩니다. 정보의 불균형은 그가 다시 표가 필요하기 전까지 우리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그를 선택하는 까닭은 그가 나의 내면의 욕구(확증편향)를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이유는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를 통해 내 이익을 지키고 키우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를 통해 나의 믿음(세상은 돈이 최고다)을 확인받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내가 듣고 싶은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듣고자 하는 말만 합니다. 그가 아무리 허황된 말을 뱉어내도 나는 그의 말에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는 내가 딛고 서있는 이 사회의 토대가 안전하다고 여기게끔 합니다. 
  
나의 믿음 반대편에는 이 쪽과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후보들을 지지하는 무리입니다. 이들은 내 편에 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이런 사회를 만들었는가? 돈과 안정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쟁이와 파렴치범, 정신병자에게도 리더십을 건네 줄 당신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더 불행해지고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져 가는 것 아닌가!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시스템을 선호하고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안전망은 아랑곳 하지 않는 당신들이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좀먹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 중 극히 일부가 다른 이들의 희생을 대가로 지나치게 많은 재화를 차지하고도 그런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궁극에 가서는 언제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를 해치는 우리 사회의 결말은 어떻겠는가? 당신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도 아니면서 이들은 왜 이렇게 생각할까요? 왜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우리 때문이라고 매도하나요? 자신들은 가진 것이 없는데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가 무슨 부정한 짓을 했으리라고 믿기 때문인가요? 지나친 분노와 불길한 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선호하는 후보는 새치기, 앞지르기, 끼어들기와 같이 남을 제치고 앞서가기를 능사로 하는 나 같은 사람입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법과 질서, 규칙을 무시하고 건너뛰는 일쯤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편법들은 다른 사람 모두가 고지식하게 법과 질서를 지켜야만 효율도 높고, 앞지르는 희열도 그만큼 큰 법인데,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니 편법의 지름길 경쟁이 더 치열하게 되었다는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는 착한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편이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얻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마저도 듭니다. 이번 붓두껍은 비록 누구를 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선거 때는 분명 ‘나 같지 않은’ 후보를 찾게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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