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을 떠났다. 지난해 10월 직장을 그만둔 뒤 다른 지역에 새로운 일을 구했다. 전세 계약을 한 지 얼마 안 된 집이 아깝고, 옥천에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익숙한 단골 국밥집과 미용실, 카페가 멀어지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때라고 생각했고,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기회는 다른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옥천읍보다 훨씬 적은 인구가 사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으로 이주했다. 월악산 자락에 위치한 덕산면은 옥천보다 춥고, 작고, 좁을 것이었다. 내가 취직한 곳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대안학교라는 점은 다행스러운 동시에 걱정스러운 사실이다. 마치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나는 쉽게 정착하는 만큼 쉽게 질릴지도 모른다.
내 이주 및 취직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옥천에서 ‘오직 놀기 위해 뭉친’ 옥뮤다 구성원이자 절친 호미는 이렇게 말했다.
“예림 씨 가면 이제 나 누구랑 놀지? 지난번에 만났던 그분들이랑 친해져야겠다.”
호미의 능청스러움이 웃기고 좋았다. 떠나는 일이 아주 흔한, 가벼운 변화처럼 느껴졌다. 이 말 덕분에 나는 첫 사회생활이자 지역생활을 해낸, 외로웠던 만큼 기억에 남는 옥천을 떠나면서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호미를 비롯한 친구들은 내 앞날을 축하하며, 어디서든 또 만나자고 했다.
반면 덕산에서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은 내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단체 카톡방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으로 가득 찼다.
김: 엥.
이: 오늘이 만우절인가?
박: 몰카야?
같은 학교를 나와 현재 덕산에 살고 있는 선후배의 반응도 비슷했다. ‘여길 왜...’ ‘시골만 찾아다니네’ 혹은 ‘1, 2년 뒤에는 뭐 할 계획이냐’는, 덕산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를 가정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이들에게 6년 내내 살았던 동네가 새롭지 않은 건, 따라서 내 삶의 다음 거점으로 다시 이곳을 택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천 시내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반, 충주 시내까지는 대중교통으로 40분이 걸리는 깊숙한 산골짜기에 사는 게 어떤 불편을 뜻하는지 누구나 안다. 리틀포레스트니 자연에 가까운 삶이니 하는 말로도 감춰지지 않는 기본적인 의료·문화 시설의 부재 너머에는 선택지에서 아예 배제된 지역이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추억 속에 있지만 현실 속에는 없는, 세상이 두 쪽 나도 새로운 일이 벌어질 리 없는, 가깝고도 먼 지역, 이제 내 삶터이자 일터가 된 덕산이다.
내 삶에 변곡점이 되었던 순간이 차례로 떠오른다. 중고등 기숙형 대안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졸업 후 옥천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그리고 다시 덕산으로 이주하겠다고, 대안학교에서 일 해보겠다고 입 밖으로 처음 내뱉었을 때. 그 선택 마다 내 의지의 함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나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고 새 터전에 자리를 잡았을까? 어쨌든 매번 새로운 세계를 만났음이 분명하다.
처음 ‘지역’이라는 관점을 얻은 게 옥천임을 잊지 않는다. 잘 드러나지 않는 소외된 지역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아갈 때마다 놀라워했던 몇 년 전의 나를 잊지 않는다. 또 ‘배웠다’고 느낀 기억을 나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고 흥미로운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의 나를 잊지 않겠다. 나보다 긴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이 지역을 볼 줄 알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로 미뤄진 개학을 기다리며 지방자치, 지방소멸 등 지역의 눈으로 덕산을 바라보는 수업을 개설했다. 수업 제목은 소녀시대의 정규1집 수록곡 제목이자, 지역을 새롭게 바라볼 눈에 걸맞는 ‘다시 만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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