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은빛기획 천호선 이사장

사람은 끊임없이 기록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마주한 채 기록한 자서전을 남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삶의 기록’을 보며 자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음에도 말이다.

협동조합 은빛기획(이하 은빛기획)은 '역사보다 중요한 것이 한 사람의 삶'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민이 직접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목표다.

은빛기획은 대표인 전 고용노동부장관 정책보좌관 노항래씨의 제안으로 2013년 4월 설립됐다. 운영 철학에 공감했던 14명이 조합원으로서 동참했고, 2018년 이사장에 취임한 천호선씨(57)도 설립부터 함께했다. 청와대 대변인·홍보수석과 정의당 대표를 역임했던 그가 협동조합 운영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천 이사장은 “정계에 몸담을 때부터 사회적기업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그는 정의당 대표시절인 2015년, 새로운 강령을 만들면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특별한 강조를 담았다. ‘공정한 시장경제, 정의로운 공공경제, 협동의 사회적경제가 서로를 보완하고 촉진하는 새로운 상생의 경제 체제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특히 은빛기획의 노인 자사전 사업이 민주시민교육 및 평생교육과 맞닿은 지점이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갔다”며 “은빛기획의 시민 ‘삶의 기록’ 확산노력이 개인적 가치를 뛰어넘어 사회적 가치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담다

위안부 할머니 고 이순덕님 조문보./사진제공=협동조합 은빛기획

은빛기획은 지난해 5월, 고용노동부가 인증한 창의·혁신형 사회적기업이 됐다. 대표사업은 ‘조문보(弔問譜)’다.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기 위해 고인의 살아온 이야기가 담긴 약전(짧은 전기)을 제작하는 사업이다. 2014년 7월 상표를 출원했고, 2015년 3월 등록이 완료됐다. 조문보는 유족이 고인이 남긴 추억에 젖어들 수 있도록 돕고, 장례식장을 방문한 조문객에게 드리는 감사의 글이기 되기도 한다. 

지난달에는 조문보와 연계된 ‘생애보(生涯譜)’를 상표등록 출원해 심사 중에 있다. 생애보는 ‘사전 제작된 조문보’다. 살아계신 분의 약전을 토대로 생애보를 만들어 놓은 후, 돌아가신 후에 장례 정보를 추가해 조문보로 활용할 계획이다.

특히 은빛기획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생애보와 조문보를 무상제작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 9분이 살아계실 때 조문보를 생애보로 사전 제작했고, 현재 6분이 돌아가셔서 6종의 조문보를 제작했다. 천 이사장은 “위안부 어머님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했다”며 “조문보의 의미에 걸맞은 가장 보람찬 일”이라고 평가했다. 

기록하며 돌아보는 삶

서울시가 대한노인회서울시연합회와 함께 1만5천권을 서울시 어르신께 보급한 '인생노트, 삶을 기록한다' 책./사진제공=협동조합 은빛기획

은빛기획은 소속작가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조문보, 보훈유공자 자서전 제작, 글쓰기 교육 등으로 한정돼 있다. 기본적으로 인생을 자신이 직접 기록하도록 하는데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교육도 자서전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마련됐다. 스스로 쓸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것이 목적이다. 천 이사장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며 반추하도록 돕겠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인생노트 보급사업이 그 일환이다. 나의 오늘과 살아온 길, 그리고, 자식에게 남기고 싶은 말 등을 적어 넣으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와의 협업을 통해 매년 7천 부씩 보급하는 서울시를 비롯해 다양한 도시·기관과 함께 하고 있다. 올해는 전주시·울주군과 새롭게 인생노트 보급을 진행할 계획이다.

천 이사장은 “인생이 담긴 인생노트와 같은 자료가 수천, 수만 개가 쌓이면 생활사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후대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어땠는지, 어떤 의식을 갖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글과 인생으로 세대공감

성동구 어르신들의 자서전집 '삶이 노래가될 때' 출판기념회./사진제공=협동조합 은빛기획

은색은 변화를 상징한다. 나이가 들면 검은 머리색이 점차 은빛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은색은 균형을 상징한다. 흰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배합된 은색은 다른 색상을 비추고, 반사해주기에 다른 색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특징이 있다.

노인과 청년의 ‘균형’도 가능함을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증명하고 있다. ‘청년과 함께하는 어르신 자서전 제작’ 사업이 그것이다. 종전에는 은빛기획 소속 작가가 맡았던 어르신 자서전 제작을 청년과 노인의 1:1 매칭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2018년 서초구에서 대학생과 어르신 각 10인을 연결해 소책자 10권을 발행했고, 2019년 은평구에서는 대학생과 어르신 각 23인의 활동을 통해 통합 책자를 출판했다. 

천 이사장은 “세대간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는 의미있는 사업”이라며 “청년에게는 어르신 삶에 대한 이해도 상승을, 어르신에게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요새는 ‘기록문화’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비전을 품고 있다. 2017년부터 2년간 은평구 보훈유공자에게 생애보와 영상 자서전을 함께 제작해봤다. 어르신들은 인쇄물인 생애보를 더 친근하게 여기는 반면, 자녀들은 영상물을 더 좋아하는 데서 착안했다. 그는 “장례식장에 얼마 전까지는 지방이 놓여있었고, 요새는 사진이 놓인다. 미래에는 영상이 재생될 것”이라며 “기록문화를 영상으로까지 확장해 생생하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자료를 남기는 것 또한 의미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죽음을 사회가 책임져야”

노년문화를 담당하는 기관의 장으로서 천 이사장은 정부를 향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죽음의 사회적 준비’라는 개념을 제시한 그는 “‘웰빙’이 중요한 것처럼 ‘웰다잉’, 즉, 죽음에 대한 논의도 굉장히 중요하다”며 “죽음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구체적으로 “죽음을 각자 혼자서 공포 속에 맞이하게 두어선 안된다”며 “죽음에 임하는 철학적 태도, 삶의 자세 등을 굳건하게 세워줄 수 있도록 죽음을 토론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따라서 사회적기업의 역할이 귀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담당하기 어렵거나 아직은 미비한 부분을 사회적경제기업들이 선도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천 이사장은 특히 삶 전체를 소재로 삼아 그 삶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은빛기획의 활동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은빛기획이 “각자의 삶의 가치를 높여 모든 이의 삶이 존중받게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뚜렷한 비전을 드러냈다.

‘상처입은 삶이었지만, 힘껏 꽃을 피웠습니다’라고 적힌 위안부 피해자 고 이순덕 할머님의 조문보 문구가 은빛으로 반짝 빛났다.

 

협동조합 은빛기획 로고./사진제공=협동조합 은빛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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