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란 중세적 신분제를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시대를 말한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자유주의·내셔널리즘(국가주의) 등을 근대의 성립 요소로 꼽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민족을 형성했던 서구와 달리 한국은 근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민족체’를 형성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역사 발전의 과정과 성격도 서구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자본주의에 비롯한 서구의 경로와 달리, 양반 신분제 타파가 근대화의 중요한 관건이었다.     

19세기 초 신분제에 반발한 민초들의 동요와 저항은 곧 근대화의 태동이었다. ‘홍경래난’, ‘삼남민란’,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이어진 민초들의 끊임없는 봉기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난’이었지만,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볼 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외친 근대적 혁명의 성격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두 가지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신분제를 타파하고 자유·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자주 독립의 문제였다. 이를 위해 서구의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개화·개혁운동이 일어났고, 한편에서는 불평등한 신분제와 지배층의 수탈에 맞서는 민의 움직임이 심하게 요동쳤다.  

1868년 제국주의로 탈바꿈한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으나 조선 정부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정부가 존재했지만, 일본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평민)이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민족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이와 함께 민이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다. 

신돌석 의병 전투 기록화.

평민의 성장은 동학농민전쟁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서장인 의병전쟁의 과정에서도 두드러졌다. 전기 의병에서 유생들이 주도했던 것과 달리 중기 의병에서는 평민이 의병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등장은 그것을 상징했다. 의병의 확산과 함께 구시대의 신분제도 무너져 갔다. 이처럼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적 문명의 수용만이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이나 의병전쟁 등에서 민의 성장을 통해 촉진돼 갔다.  

1910년 망국 후 평민의 역할은 2백만 명 이상이 참가한 3·1운동에서 단연 돋보였다. 평민들이 독립 주권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의 일이었다. 만세시위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만세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며,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동참하는 민족 역량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역사의 혁신이었다.  

3·1 운동이 민족 총화에 의한 ‘선언’과 ‘함성’이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선언’과 ‘함성’의 실천이었다. ‘대한제국’으로 망한 나라를 독립운동의 힘으로 1919년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유·평등에 의거한 정부·의회·사법의 삼권분립, 보통선거제 등을 도입하며 명실상부한 근대적 국가 체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상황에서 영토와 국민적 요소를 채 갖추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새로운 국가를 염원하는 전민족의 주권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근대국가를 지향한 민족적 의지는 3?1운동과 더불어 국내외 각처에서 수립된 7개의 임시정부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이들 임시정부는 모두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그동안 혁명적으로 추구한 민주주의 이념과 공화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한국근대사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주의는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를 극복하고, 인류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한국독립당 당헌 당규, 대한민국건국강령, 한국광복군 공약.

독립운동의 근대적 정치 이념도 3?1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돼 갔다.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의 잔재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국민 주권주의가 보편화되어 갔다. 1910년대에는 복벽주의 이념, 입헌군주론의 보황주의(保皇主義), 국민주권주의 이념 등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군주를 따르는 백성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서 우뚝 자리 잡아 나갔다. 농민과 노동자, 백정 등 사회 각 계층으로 독립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독립운동의 근대성이 구체화됐다. 

독립운동을 민족적 총력으로 전개한 것도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 단체들이 조직돼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며, 압록강·두만강 연안에서 5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활동하면서 그 규모도 1만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모두 민병들이었다. 스스로 무장을 갖추고 독립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대한제국 당시 군대가 채 1만 명도 안 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는 근대화를 더욱 촉발시켜 나갔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학생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여성운동·소년운동·형평운동 등 사회 각층에서 총력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이는 민족말살과 식민지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를 전면 부정한 민족적 저항이었다. 독립운동이 대중 속을 파고들면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숫자만도 5백만 명이 넘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은 가히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은 단지 항일투쟁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 근원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나라를 세우려는 꿈이 담겨져 있었다. 독립운동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근대화운동이기도 했다. 때문에 독립운동에 의해 봉건적 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고, 민주주의도 구현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의 사상과 이념이 다양했던 것 역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 열망이 다원하고 심원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 등의 어느 한 사상에 치우치거나 매몰되지 않았던 것이 독립사상의 특징이자 특질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세계 사조를 독립사상에 접목시키며 독창적인 것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자유와 평등, 평화의 독립사상은 그렇게 형성된 것이었다. 이회영의 자유사상·안중근의 동양평화론·안창호의 대공주의·조소앙의 삼균주의·김구의 문화국가론 등은 한국 독립사상을 대표하는 독창적 이념이었다. 

1941년에 이르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건국강령〉에는 독립사상에 의거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민주국가 수립에 필요한 강령을 마련할 수 있었다. 〈건국강령〉은 광복 후 새롭게 건설할 국가의 기본 틀을 제시한 것이었다. 〈건국강령〉의 정신이 광복 후 대한민국에 전승되었던가는 별도로 치더라도, 광복 직전 새로운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구상하고 정립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던 사실은 독립운동의 역량은 물론 근대화의 관점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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