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여러 기관에서 임시 휴업, 휴관을 결정한다.

늘 붐비던 도로의 교통체증이 사라지자 시원하다는 생각보다 무언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뒷덜미를 파고듭니다. 텅 빈 극장에서 마치 ‘남산의 부장님’인양 홀로 허세를 부려 봐도 그다지 신이 나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모임이 별다른 논의 없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어 조심스레 다른 의견을 얘기하면 ‘당연한 것 아니냐’며 한 목소리로 무시합니다. 2월의 졸업식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집에 묶여있어 유치원 셔틀버스가 운행을 멈췄습니다. 기이한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낯선 상황들이 오랫동안 겪어온 듯 익숙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독감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출현하는데, 금세기 들어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주기가 당겨지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는 동물에게서 인간으로 전파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이 신종 바이러스는 기존의 인간 독감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에도 영향을 받지 않기에 빠르게 많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신종바이러스는 강한 전염력과 더불어 이것이 어떤 종류인지, 대응 방법(치료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심리적 불안감까지 합해져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듭니다. 전파력과 독성이 강한 불안감은 종종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합니다. 딛고 선 곳이 흔들거리는 듯한 불안감이 사회를 뒤덮을 때 요란스러운 액션과 함께 선정적으로 위기를 선동하는 자(미디어)가 발호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병원균의 등장은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질병이 나타날 때마다 인류는 대응력을 키워왔습니다. 우리사회도 ▲사스 ▲메르스 ▲조류독감(AI) 등을 겪으면서 의료기술적, 제도적, 사회문화적으로 위기관리능력과 시스템을 갖추고 축적해 왔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잊고서 마치 처음 맞는 절체절명의 위기라도 되는 양 우왕좌왕 혼란에 빠져든 것은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인 사고패턴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밖(미디어)에서부터 주어진 정보들에 대한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습관화된 사고가 사안에 따른 주체적 태도를 막아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익숙해진 것들을 당연시하곤 합니다.

주류(매스)미디어들은 항상 ‘지금 발생하고 있는 사건(뉴스)’에 집중합니다. 선정성이 강하고, 때로는 미디어 스스로가 가짜뉴스의 전달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것도 늘 새로운 사건을 쫓아야하는 미디어의 숙명 때문입니다.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볼모로 해 쏟아져 나오는 신종 바이러스 관련 보도에서 우리의 질병관리통제시스템이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제대로 기능하기에 과도한 불안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라는 뉴스는 듣지 못했습니다.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한다는 이야기는 뉴스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한 교민 수용지 선정에 따른 혼선이나 마스크 품귀 현상과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는 뉴스만 선택적으로, 반복해서 보도하는 미디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때문에 조용한 목소리로 진실 그대로를 전하고, 긴 안목으로 파장과 후유증을 최소화 하자는 제언에 귀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미국 독감이 더 위험하다고 알리는 워싱턴 포스트 기사. /사진=워싱턴 포스트

최근 2년간 미국인 2만 명을 사망케 한 독감이 현재까지 미국 내 사망자가 없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경고한 2020년 2월 1일자 워싱턴포스트 의학전문 레니 번스타인 기자의 기사는 ‘실제적 위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구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습니다.

"…당연히 미국 안에서 더 많은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나타나고,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수퍼마켓에서 장을 볼 때 바로 당신 옆에 서 있는 이는 아닐 것이다.“

가능성과 개연성의 구별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로또복권 당첨확률이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매주 당첨자가 나오니, 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제로입니다. 기사가 강조하는 점은 ‘당신은 아니다’ 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5년 전, 몇 달에 걸쳐 우리의 온 감각을 집어 삼킨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희생자가 총 38명인 것과 그 해 고의적 자해(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일일 평균 37명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2015년, 13,513명이 고의적 자해로 사망. 중앙자살예방센터 통계). 자살은 겉보기에 개인의 선택처럼 보여도 그 원인이 사회적 병폐로 인한 경우(사회적 타살)가 대부분이어서 사회가 예방에 나서 막을 수 있는 질병과 같습니다. 하루 37명이 사회적 타살로 희생되는데, 자살을 예방하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보도의 양은 연 38명의 희생자를 낸 메르스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오늘의 매스미디어는 생사의 기로를 오락가락하는 수많은 고의적 자해자 후보군과 그 몇 배에 이르는 (예비)유가족에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한숨만 쉬며 다시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빠질 사람들을 위한 기사는 찾기 어렵습니다.

내가 수용하는 미디어의 정보가 편향적이고,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의문을 체화하면 그 정보가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는지, 거꾸로 대중을 한 쪽으로 유도하는지, 위기를 조장하는지를 가려내는 안목이 생겨납니다. 균형적 사고가 합리적, 창조적, 그리고 생산적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잘못될 수 있는 건 항상 잘못된다'는 머피의 법칙은 단지 ‘재수 없는 일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야 마는 일’에 대한 경고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기억해야만 하는 일을 망각하고(망각하는 순간 행동도 멈춥니다), 사소하지만 해야 할 일을 빼먹거나 설렁설렁 넘겼을 때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입니다. 잘못된 사고의 틀을 전환함으로서 우리는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대가’의 무게를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