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언젠가 후배가 이런 질문을 했다. “밥상 차리는 일 지겹지 않아요? 나도 십몇 년 했더니 슬슬 요령이 나던데.” 부엌 일이 마냥 좋을 리는 없다. 나도 번역가, 저자로서의 직업이 있고 역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건만, 흔히 하는 말로 요리에서 청소, 정리까지, 이놈의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아직도 “집에서 온종일 한 일이 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행주치마를 넘겨주고 집을 가출할 일이다. 내가 즐겁게 밥상을 차리 이유는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일에 보상이 따르
1.크리스마스 명절. 종교는 없지만 명절은 언제든 의미 있는 날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가족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뭐든 기념하고 즐길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기를 좋아하기에 명절은 주로 갈비찜, 오븐오리구이, 치킨, 찜닭 등 육류가 주를 이룬다. 아침에는 햄과 두부를 썰어 넣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나는 김칫국물 한 국자를 추가하고 고춧가루 1스푼을 넣고 참치액젓으로 간을 맞추는데 역시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다. - 크리스마스이니까 저녁에 뭐든 만들어 기념해야지?-
1.지난여름, 중년 남성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조리법을 짧은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하는 코너를 의뢰받은 후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80종에 달하는 음식을 소개하고 농막, 요리, 가족, 사회 등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은 졸문도 그만큼 되었다. 기껏 집에서 가족들에게 집밥이나 차려주는 솜씨로 무슨 조리법이냐 했지만, 애초에 조리법보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의미 있다는 말에 크게 고민도 하지 않았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을 쓸 공간보다 고마운 선물이 없다. 때마침 써야 할 책도 몇 권 빚진 터라 글
1.아내가 새벽에 일어나더니 통증을 호소한다. 왼쪽 아랫배 쪽이 끊어질 듯 아프단다. 내가 보기에도 심각했다. 얼마나 아프면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저렇게 엎드려 있는지, 원. 잠시 후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아무래도 병원 응급실에 가야겠다며 옷을 갈아입는다. 이럴 때면 운전을 못하는 나 자신이 더더욱 한심하기만 하다. 아내는 병원에서도 정신을 못 차린다. 의사가 진통제를 많이 놓았다는데도 고통은 전혀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간호사들한테 한두 번 호소를 해본다. 9시 이후,
1.3월초 농막의 문을 열고 한 해의 텃밭 농사를 시작한다. 중순경 씨감자를 심고 나면 잠시 쉬었다가 4월 후반경 고추, 옥수수, 가지, 토마토, 호박, 오이, 참외 등 본격적으로 모종을 심고 파종을 하기 시작한다. 기껏 1주일에 한 번 가는 농막이라 손길도 모자라고 잡초와 병충해는 늘 내 능력을 넘어서고 만다.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아가자고 시작한 농사이니 아쉬움은 없다. 호박, 오이, 참외는 지난해 이어 올해도 실패이고, 감자. 고추, 옥수수는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고구마는 지난해와
1.배추농사는 완전히 실패했다. 지난해만 해도 그럭저럭 농약 없이 키웠건만 올해는 좁은가슴잎벌레 성충이 기승을 부렸다. 텃밭에 갈 때마다 3시간씩 쪼그려 앉아 잡기는 했어도 벌레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김장철을 앞두고도 배추는 도통 결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올해는 가을장마가 길어진 탓에 배추도 금값이란다. 올 김장은 내가 기른 배추로 하겠다고 큰소리까지 쳤건만 체면을 구기는 건 둘째 치고 거금까지 쏟아 부어야 할 판이다. 처가 식구들과 우리 집 김장을 하려면 적어도 50~60포기는 있어야 할 텐데 시장에
1.봄이 반가운 이유는 들판 여기저기 봄나물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쑥, 냉이, 달래, 전호, 돌미나리, 영아자, 민들레 등 이런 저런 나물을 채집하는 것만으로도 텃밭 작물을 보충하고도 남는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물은 냉이와 달래, 노지의 냉이, 달래는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작고 손도 많이 가지만 그 맛과 향만은 어느 음식에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가을이면 텃밭 주변에 달래가 쑥쑥 올라온다는 사실은 몇 해 전에 알았지만 그 동안 냉이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와 농막 주변을 산책을 하다가
1.내 몸은 디톡스 중!- 오늘부터 집에서 반주 안하기로 결심했어요. - 정말? 진짜 잘 생각했어요. - 이번에는 무기한. 나 죽을 때까지 지킬 거요. - 그래도 맥주 한 캔 정도는 봐줄게요. 매일 저녁 소주 한 병 이상을 식사 반주로 마시며 산 지도 여러 해다. 올해 초, 친구의 권유로 한 달 “가내 반주 금지”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그 후로는 다시 옛날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연히 아내의 걱정도 그만큼 올라갔다. 반주를 하지 않을 때만 해도 그러다가술을 줄이겠거니 했을 텐데 예전보다 주량이 더 늘었으
1."나 한잔 했어, 엄마"아내가 딸의 전화를 받더니 깔깔깔 웃으며 스피커를 켜놓는다. 나보고도 들으라는 얘기다. - 너, 취했지?- 응, 오늘 시험 마지막 날인데 어떻게 그냥 와? 과 애들 불러서 한잔 했어.- 야, 공부도 안한 애가 시험 끝났다고 유세냐?- 헐, 내가 왜 공부 안 해? 사흘 밤을 꼬박 샜거든? 안한 게 아니고 못한 거란 말이야. 내가 좀 바빠? 회사 다녀야지. 알바도 해야지. -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심해서 와.- 응,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딸의 주정(?)은 집에 와서도 이
1.8년간 해오던 번역 강의를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수강생 모집이 힘들어지면서 담당자가 힘들어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별로 수입도 되지 않는 강의를 이끌어 온 것은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번역계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마저 자신이 없다. 특별한 전문직임에도 당당히 권하지 못하는 건, 돈벌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자본주의 논리에 맡기다 보니 출판산업의 부진과 함께 번역료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입이 적으니 인재가 등을 돌리고 당연히 번역의 품질은
1.농사도 이상과 현실 속에서.텃밭 농사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깨끗한 채소를 먹기 위해서다. 농약 없이 농사 짓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랬다간 감자, 고구마는 몰라도 고추, 오이, 호박들은 진딧물 점심식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작은 규모의 텃밭이어서 화학농약 대신 천연농약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난황유에서 시작해, 돼지감자, 은행 등을 고아 살포하다가 요즘엔 성능이 좋다는 자닮유황, 자닮오일을 직접 제조해 사용하고 있다. 효과가 있다. 첫해 고추에 진딧물이 있어 살포하고 일주일 후에 확인했더니 깨끗해졌다. 그
1.텃밭을 시작한지 8년이다. 생전 땅을 가져본 적도 없고 밭농사는 구경도 해보지 않았다. 이제는 농막까지 그럴 듯하게 지어놓고 매년 감자에서 김장, 무, 배추까지 키우지 않는 채소가 없다. 조그맣게 과수원도 마련해 사과, 배, 복숭아, 오디, 복분자, 블루베리 등을 키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8년 전국 텃밭면적이 1300ha,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212만 명이다. 10년 만에 15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정부는 여기에 더해 2022년까지 도시농업 인구를 400만까지 올릴 계획이다. 텃밭이 기존 농업
1.살림은 전문직이다.오래 전 아내한테 살림을 빼앗을 때만 해 살림은 요리와 청소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부엌에 들어가 보니 요리는 세부항목이 500개가 넘고 각 항목마다 시행세칙이 5000개씩 붙어 있었다.청소도 마찬가지다. 집을 청소하는 건 기본이다. 주방 환풍기 세척, 화장실 청소, 분리수거, 음식물 처리, 정수기 필터 교체 등등. 방법과 시기와 도구가 다른 일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요리는 아예 상상을 불허했다. 음식마다 육수 종류가 다르고, 재료 속성을 살펴 조리에 투여하는
1.불과 60여 포기의 배추이건만 벌레 잡는 시간이 꼬박 3시간이다. 지난해는 녹색의 배추벌레가 많더니 올해는 좁은가슴잎벌레, 배추흰나비애벌레 등 종류가 더 다양해졌다. 크기도 작아 하나씩 잡아내는 것도 고역이다. 그나마 배추는 괜찮은 편이다. 작년과 달리 무는 초토화를 면치 못하는 모양이다. 천연농약으로는 어림도 없군. 은행열매가 좋다는데 내년엔 그거라도 삶아 뿌려볼까.2.농사야 아무렴 어떠랴. 애초부터 자연이 주는 대로만 먹자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사실 농사가 아니더라도 이 땅엔 먹을 것
1.기껏 나이 예순 전이건만 아내는 벌써 내 노년이 걱정인가 보다. 입버릇처럼 어디 아픈 데 없는지 묻고 행여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무조건 병원으로 끌고 간다. 이상 없다고, 아직 건강하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소용이 없다. 몇 년 전 가볍게 대상포진을 앓았는데 그 바람에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사람, 마음만 더 바빠진 것이다. 아내의 불안도 이해가 간다. 정정하시던 장인께서 갑자기 쓰러진 후 10여 년을 누워계시다가 불과 몇 년 전에 영면하셨다.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당장 장인의 모습이 겹쳐 보일 것이다. 생전의
1.모 국회의원이 청문회에서 비혼의 여성장관 후보자에게 “출산의 의무부터 다하라”는 황당한 주문을 했단다. 사실 그 국회의원이 특히 가부장적이어서 비난을 받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 생각엔 그런 식의 남성중심적 가치관, 관점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결혼하면 여성은 당연하다는 듯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만 그 노고마저 경력단절, 부엌데기 같은 언어로 폄훼한다.요리와 육아, 어느 쪽이나 오랜 경험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전문영역이건만 이 사회는 아무 가치 없는 허드렛일 정도로
1.남들은 명절 준비다, 명절 증후군이다, 명절 앞뒤로 몸과 마음이 바쁘다지만, 우리 형제 가족은 그런 기분과 거리가 멀다. 예전에는 형님 댁에 모여 윷놀이도 하고 트럼프 놀이도 하고 고궁도 산책했는데 10여 년 전 아버지 돌아가신 후 교통이 뜸해지더니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지방요양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벅차다. 다들 먹고사는 게 바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다는 듯 차례도 사라졌다. 시장을 보고 전을 붙이고 절을 하는 등의 번거로운 행사는, 가톨릭 신자인 형이 성당 미사로 대신
1.아내와 딸은 방학 동안 복싱을 배우러 다녔다. 건강과 다이어트가 목적이라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운동이라기보다는 춤을 추다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름도 뮤직복싱이다. 모녀가 나란히 체육관에 다녀오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했다. 단 불똥이 내게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만이다. 두 사람은 기껏 춤추러 다니면서 방학동안 나한테 유세를 부렸다. 아내는 툭하면 내 배를 노려보았고 딸은 아예 배를 쓰다듬으며 이 배 어쩔겨, 이 배 어쩔겨? 놀려댔다. 올해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을 게을리 한 잘못이 있기는 하다. 매주 기껏
1.매년 8월 20일 경이면 김장용 배추와 무, 알타리무, 쪽파들을 심는다. 농사는 한주 전 농작물 심을 자리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6월 말 감자를 수확한 곳에 심어야 하는데 두 달이 지나니 잡초가 무성하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차가운 지하수를 뒤집어 써가며 몇 시간 풀을 제거하니 거의 실신 지경이다. 그 위에 다시 유황과 퇴비를 뿌려둔다. 퇴비에서 가스가 발생하면 생장에 문제가 있기에 적어도 한 주 정도는 미리 뿌려두는 게 좋다. 다음 주에도 할 일은 태산이다. 일단 이랑을 만들어야 한다. 삽으로 고
1.1984년 KBS 이라는 아침방송에 출연하라는 얘기가 있었다. 당시 검정고시 합격자 몇을 불러 사연을 듣는 취지라고 들었으나 난 고민 끝에 포기했다. 가난을 과장, 포장해 시청자들의 동정을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카메라 공포증이 더 컸다. TV 방송국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하늘이 아득했다. 몇 해 전 를 출간했을 때도 몇 차례 연락이 왔으나 그때도 난 딱 잘라 거절해야 했다. “TV는 무서워서 못나갑니다.” 사실이다.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