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희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는 장례 행렬이 지나는 연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 30분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동묘 등 여덟 곳에서 연차적으로 일어났다. 연도에 배열해 있던 학생들이 준비한 ‘격문’을 힘차게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을지로 부근에서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 이어 동대문 앞에서는 일본군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며 70~8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북간도에서 삼둔자전투에 이어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며 독립전쟁사에서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거기에는 독립군의 전설적 ‘영웅’, 김좌진과 홍범도가 있었고, 2천여 명의 병력으로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물리친 승전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의 독립군을 기억하는 것은 왠지 익숙지 않다. 독립군 전투사를 보면, 일본군과 싸워 이긴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천여 차례에 걸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거행한 안중근 의거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의 사상인 ‘동양평화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것은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길이었지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안의사는 이토 처단 후 국제재판소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평화의 진실을 알리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일제의 강제 인도(引導) 및 불법 재판에 의해 안의사의 계획은 차단되고 말았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으로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나 다름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 당사자는 물론 부모 형제 자식까지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어야 했기에 나온 말이다. 그만큼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야만 했던 험난한 길이었다. 그런데 가문 차원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경우가 있으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일가가 대표적이다.1910년 나라가 망하자 우당의 6형제들은 만 여석의 전 재산을 처분하고 50여 명의 가솔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했다. 잘 알려지듯이 신흥무관
근대란 중세적 신분제를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시대를 말한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자유주의·내셔널리즘(국가주의) 등을 근대의 성립 요소로 꼽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민족을 형성했던 서구와 달리 한국은 근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민족체’를 형성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역사 발전의 과정과 성격도 서구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자본주의에 비롯한 서구의 경로와 달리, 양반 신분제 타파가 근대화의 중요한 관건이었다. 19세기 초 신분제에 반발한 민초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전쟁을 신호탄으로 1945년 광복까지 50여 년간 전개됐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도 5백만 명이 넘었다. 한인이 있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어디든지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천 개의 비밀단체, 만세운동, 농민·노동·여성의 대중운동, 학생운동 등 각 부문에서 민족총력적으로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수많은 독립군 단체가 세워졌고, 중국의 상하이와 충칭 등에서는 임시정부가 활약했으며, 미주의 한인들은
3·1운동 100주년의 열기가 이어지면서 ‘제2의 3·1운동’인 '6·10만세운동'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융희황제)의 국장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거사 3일 전 사전 발각되면서, 당초 계획에 미치지 못한 채 서울지역에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6·10만세운동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특별했다. 6·10만세운동이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3대 민족운동으로 꼽히는 이유다.먼저, 6·10만세운동에는 계획 과정에 참여한 세력들이 다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의 역사에는 아직도 식민용어나 식민사관에 의한 서술들이 독버섯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몸에 짙게 배어 떼어내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부지기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광복된 지 70년도 넘은 우리의 현실이다.우선 식민용어의 대물림이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강제 지배한 것을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 불렀다. 처음엔 ‘일한합방(日韓合邦)’이라 부르다가, 한국과 일본이 동격의 나라가 아니라며, 천황의 나라인 일본이 제왕의 나라인 한국을 복속했다고 해서 ‘병합’이라 고친 것이다. 합방과 병합에는 그런 차이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해를 떠나야 했다. 임시정부 인사들도 남경·진강·항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1940년 중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는 항주·진강·장사·유주·광주·기강 등을 전전하는 이른바 ‘유랑시기’를 맞이한다. 임시정부가 첫 번째 향한 곳은 절강성의 항주였다. 임시정부가 항주에 머문 기간은 3년 6개월 남짓이었다. 남송(南宋)의 도읍이었으며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주였지만, 임시정부에게는 눈물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 폐지를 외치면서,
1932년 3월 초 윤봉길은 상하이 홍구시장에서 야채 행상으로 나섰다. 홍구공원 정문 옆에 위치한 이곳은 일본인 거리의 중심지였다. 바로 건너에는 일본군 사령부도 있었다. 그가 살던 프랑스 조계와는 전차로 30여 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다. 윤봉길은 전차 차장을 하는 계춘건과 함께 매일 오후 그 곳에 나타나 야채를 팔거나, 때론 밀가루도 팔았다. 행상은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홍구공원 정문을 지나 후문 밖 일본인 거주구역까지 왕래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물론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였다. 일본인을 가장할 만큼 일본어도 능숙했
흔히 3·1운동의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설명으론 아무래도 부족하다. 상식적으로도 납득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자칫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1달여 만에 급조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정부를 신속히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처에서 생겨난 임시정부는 무려 8개에 달했다. 그 중 전단(傳單)에 그친 것도 있지만, 실체를 갖춘 것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
올해는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파리강화회의 100주년이기도 하다. 1차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였던 파리강화회의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식민지 민족자결 문제는 약소민족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은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한다는 것이 전제였다. 때문에 승전국 식민지의 민족자결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의 의제에서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 그것이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합의였다.당시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다. 독립운동계 역시 일본의 식민지인 한
3·1운동 당시〈독립선언서〉가 세계 각국어로 널리 전파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0년 후인 1929년 프랑스 파리에서〈독립선언서〉와 3·1운동이 한국역사소설의 주제로 다뤄진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한국역사소설이 바로 서영해의《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이다.이 책은 28세의 청년 서영해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펴낸 것이다. 그때까지 프랑스인들은 일본이 왜곡 선전한 내용에 따라, 중국의 오랜 속방으로 자주와 독창적인 역사와 문화를 갖지 못한 한국인들이 야만 상태에 있
1919년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너무 어렵다. 독립운동사 전공자인 필자도 읽기가 꺼려지는 문장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그 원문 낭독을 고집하고 있다. 과연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시대가 바뀌면 문장도 현대어로 고쳐 읽는 게 순리일 것이다. 지금부터 90년 전 재불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1929년 파리에서 간행한 한국역사소설《Autour d'une vie coreenne》(어느 한국인의 삶)에서〈독립선언서〉전문을 불어로 번역해 실었다. 원문의 뜻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번역한 이 선언
3·1운동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국내 뿐 아니라 한인이 사는 곳이면 만주·미주·연해주 등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되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며,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그 과정에서 평민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 3·1운동은 단순히 일거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아니었다. 종교계가 이념을 떠나 하나로 결집한 것은 말 그대로 획기적이었다. 종교적 배타성이 강한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면 종교
3·1운동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3·1운동이 주목받는 것은 광복 이래 처음이 아닌가 싶다. 1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당연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더 깊은 성찰이 따르길 바란다.그 첫 번째가 3·1운동의 역사적 뿌리 찾기다. 3·1운동에는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교 이념도 초월한 민족 총화의 만세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평민이 있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피지배의 위치에 놓였던 평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3·1운동의 배경 내지 계기를 말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