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넷 = 이다빈 기자"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겠습니다"스타벅스 코리아(대표이사 손정현)가 올해로 105주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을 기념해 독립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기금 1억 원을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에 전달했다.29일 스타벅스 코리아에 따르면 이번 기금 전달식은 전날(28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스타벅스 손정현 대표이사와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기금 전달식을 마친 뒤 지난 2015년부터 스타벅스가 기증한 독립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현재까지 스타벅스가 기증한
스타벅스 코리아(대표이사 손정현)가 광복 78주년을 맞아 오는 15일부터 한국의 전통 요소를 디자인 소재로 활용한 광복절 MD를 선보인다.스타벅스는 광복절 의미를 되새기고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자개공예 전문가와 손잡고 이번 상품을 기획했다. 해당 상품들은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개를 활용한 디자인의 광복절 MD 2종(자개 코스터, 자개함)과 텀블러로 구성됐다.‘코리아 자개함’은 오얏꽃과 전통 단청에 그려진 당초문양을 모티브로 기획된 상품으로, 명함이나 액세서리 등을 보관하는 소품함으로 사용하기 안
융희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는 장례 행렬이 지나는 연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 30분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동묘 등 여덟 곳에서 연차적으로 일어났다. 연도에 배열해 있던 학생들이 준비한 ‘격문’을 힘차게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을지로 부근에서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 이어 동대문 앞에서는 일본군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며 70~80
근대란 중세적 신분제를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시대를 말한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자유주의·내셔널리즘(국가주의) 등을 근대의 성립 요소로 꼽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민족을 형성했던 서구와 달리 한국은 근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민족체’를 형성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역사 발전의 과정과 성격도 서구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자본주의에 비롯한 서구의 경로와 달리, 양반 신분제 타파가 근대화의 중요한 관건이었다. 19세기 초 신분제에 반발한 민초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전쟁을 신호탄으로 1945년 광복까지 50여 년간 전개됐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도 5백만 명이 넘었다. 한인이 있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어디든지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천 개의 비밀단체, 만세운동, 농민·노동·여성의 대중운동, 학생운동 등 각 부문에서 민족총력적으로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수많은 독립군 단체가 세워졌고, 중국의 상하이와 충칭 등에서는 임시정부가 활약했으며, 미주의 한인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돼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에 따라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을 말한다. 사회적인 핫 이슈인 도시재생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이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란 그늘을 피하기 어렵다. 이 갈등을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가고 대처해나가야 할까. 그 물음과 고민에 문을 두드린 기업이 있다. ㈜가치교육컨설팅이다. 구로구에 위치한 ㈜가치교육컨설팅은 게이미피케이션 기법을 활용한 콘텐츠를 개발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재미·보상·경쟁의 요소를 담은 사회적보드게임 출시 게이미피케이션(Gamif
원주 협동 금융의 산실인 ‘밝음신협’ 본점 건물에는 무위당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방문객들은 무위당의 서화작품, 도서, 영상자료, 유품, 기념품 등을 볼 수 있다. 최근 원주에서는 그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전국 조직 ‘무위당사람들’이 ‘무위당 25주기 생명협동문화제’를 열었다. 무위당은 대체 누구일까?65만 명의 조합원이 활동 중인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한살림).’ 한살림의 전신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한 사람이 원주 출신 교육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그는 1960~1970년대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에서
어쩔 수 없이 역사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오해가 진실이나 정설이 돼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왜곡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은 오해와 왜곡이 겹쳐지며 심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 폐해는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역사와 사회를 혼란시켰다.도산 안창호(1878∼1938)의 독립운동을 보더라도 그렇다. 도산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교육자, 도덕가, 인격자, 기독교인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독립운동 또한 점진적 실력양성론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통설처럼 굳어진 이런 도산의 모습은 해방 후 이광수의《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해를 떠나야 했다. 임시정부 인사들도 남경·진강·항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1940년 중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는 항주·진강·장사·유주·광주·기강 등을 전전하는 이른바 ‘유랑시기’를 맞이한다. 임시정부가 첫 번째 향한 곳은 절강성의 항주였다. 임시정부가 항주에 머문 기간은 3년 6개월 남짓이었다. 남송(南宋)의 도읍이었으며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주였지만, 임시정부에게는 눈물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 폐지를 외치면서,
흔히 3·1운동의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설명으론 아무래도 부족하다. 상식적으로도 납득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자칫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1달여 만에 급조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정부를 신속히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처에서 생겨난 임시정부는 무려 8개에 달했다. 그 중 전단(傳單)에 그친 것도 있지만, 실체를 갖춘 것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
1.“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2.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에서 비롯됐죠.3. 대한민국의 근간을 이룬 ‘임시정부’ 수립이올해로 100주을 맞이했습니다.3.1운동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4.11 임정수립,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요?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1919년 3월 1일, 3.1운동 독립선언→ 4월 11일
"운율이 있어 낭송하면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비유적 표현을 통해 사물을 표현한다. 묘사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글쓴이의 생각이나 감정을 함축적 언어를 사용해 드러낸다."문학의 갈래 중 ‘시(詩)’의 특성을 나열한 것이다. 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시대의 사회상은 물론 작가의 생각, 감정, 느낌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글로 꼽힌다. 한국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시로써 ‘독립’을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됐다.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에서
한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배우고,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고는 금방 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1909년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39년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하고…? 역사책에 담긴 주요 사건 말고,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사연은 무엇일까?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가 미처 배우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스토리를 ‘TMI(Too Much Information)’ 방식으로 들여다본다. 사실 TM
3·1운동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국내 뿐 아니라 한인이 사는 곳이면 만주·미주·연해주 등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되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며,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그 과정에서 평민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 3·1운동은 단순히 일거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아니었다. 종교계가 이념을 떠나 하나로 결집한 것은 말 그대로 획기적이었다. 종교적 배타성이 강한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면 종교
3·1운동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3·1운동이 주목받는 것은 광복 이래 처음이 아닌가 싶다. 1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당연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더 깊은 성찰이 따르길 바란다.그 첫 번째가 3·1운동의 역사적 뿌리 찾기다. 3·1운동에는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교 이념도 초월한 민족 총화의 만세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평민이 있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피지배의 위치에 놓였던 평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3·1운동의 배경 내지 계기를 말할
헌법재판소가 종교 및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은 위헌이며, 내년 12월까지 이를 개정하라고 결정했다. 반면 입영 거부에 대한 처벌 조항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병역거부자들의 처벌 여부는 사안에 따라 대법원의 몫이 됐지만, 적어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대체 복무할 길이 열렸다. 무엇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무조건 형을 사는 일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될 전망이다.헌법재판소는 28일 판결문을 통해 “2004년 입법자에 대하여 국가안보라는 공익의 실현을 확보하면서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