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사람 살리는데 ‘첨단 기술’만 중요한가요?

최근 한 기업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과 구조‧구급 활동에 쓸 수 있는 소방용품 아이디어 공모전 ‘히어, 히어로(Here, Hero)’를 열었다. 전국 소방관들이 직접 참여해 아이디어를 낸 결과 170여 개가 모였고, 이 중 가장 많은 투표를 받은 제품을 소방서에 지원하기로 했다.

‘드론으로 사다리를 걸어 고층 화재 구조에 활용하기’ ‘격자 레이저 랜턴 내 빛의 굴곡을 이용한 실내 구조 확인하기’ 등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그런데 정작 소방관들이 당장 지원해줬으면 하는 물품 1~2위로 꼽은 것은 방검복과 신발건조기였다.

취객 구급 요청이 잦은 상황에서 폭행에 노출된 구급대원이 흉기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방검복, 땀과 물에 젖은 신발을 빠르게 말려 발 건강을 지켜주는 건조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다른 분야에서 이미 쓰이는 물건들인데 사용성을 조금만 바꾸면 소방관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

재난 상황에 필요한 훈련 툴킷을 제작하는 소셜벤처 ‘뉴베이스’는 구조 인력들에게 물품 제작 요청을 받는다고 했다. 현장에 들고 가기에 너무 크고 무거운 상황판을 경량화해달라거나, 열기와 연기가 가득한 화재 상황에서 건물 내 인명 수색 때 쓰는 표식이 좀 더 잘 보이게끔 만들어달라는 식이다.

박선영 뉴베이스 대표는 “현장에서 정말 필요한 물품은 고도의 기술이나 비싼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다”라며 “디자인을 살짝만 개선해도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는데, 방재산업의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관련 업체 자체가 드문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뉴베이스 같은 소셜벤처가 나서 지원을 받으려 해도 제약이 많다. 박 대표는 “최근 정부나 기업, 대학 등에서 시행하는 공모전이나 지원사업을 보면, 로봇, 인공지능(AI), 증강·가상현실(AR‧VR) 등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고 꼬집었다. 기술이 없으면 투자 기회조차 잡기 어렵다는 토로다.

4차 산업혁명 육성도 중요하지만, 현실의 모든 문제를 첨단 기술로만 해결하려는 건 너무 차가운 방법이 아닐까.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만의 디자인과 손재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애쓰는 기업에도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소방관들 처우 개선을 위해 국가가 나서겠다”고 공약했다. 소방인력 증원과 사후 관리도 필요하지만, 소방관이 쓰는 물건들이 바뀌면 이들의 삶이 변하고 나아가 더 많은 인명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양승희 이로운넷 기자
v9803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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