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다…소셜벤처 ‘글자와 기록사이’

# <동경책방기>는 도쿄에서도 점차 사라져가는 서점, 북카페, 문구숍 등 69곳에 대한 정보를 담은 책이다. 도쿄의 작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만든 책이라 깨알 같은 정보가 담겨 있다. 일본어가 익숙지 않은 에디터 3인은 미리 준비해간 서면 질문지로 인터뷰를 하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텀블벅 펀딩 수익금이 더해져 제작된 책은 출시 후 인터넷서점에서 화제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마포이야기>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책이다. 점차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동네 이름의 유래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된 작업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지역에 오래 살아온 주민들 인터뷰도 담는 등 지역의 변화상을 읽기 쉽게 정돈된 글과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자신이 사는 지역에 담긴 이야기를 잘 모르고 사는 요즘 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독립서적 <동경책방기>, <마포이야기>를 제작한 곳은 소셜벤처 글자와 기록사이다.

‘공익을 디자인하고, 디자인으로 세상을 기록하고 바꾸겠다’는 생각을 가진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가 2015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에 선정돼 그해 회사설립으로 이어졌다.

글자와 기록사이가 펴낸 독립서적 ‘동경책방기’는 도쿄에서도 점차 사라져가는 서점, 북카페, 문구숍 등 69곳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사라져가는 동 이름의 유래를 담은 독립서적 ‘마포이야기’

잊혀져 가는 것들을 디자인하는 사람들

글자와 기록사이는 우리 사회에서 잊히는 것들을 기록한다. 주 무기는 디자인이다. 글자와 기록사이라는 이름 또한 글자와 기록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면서도 글자와 기록사이 어디쯤인가에 있는 게 ‘디자인’이라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다.

최혜진 글자와기록사이 공동대표

글자와 기록사이의 최혜진 공동대표는 베테랑 디자이너다. 디자인 에이전시, 잡지사, 출판사 등에서 10년 넘게 디자인 일 하면서 자신의 디자인이 사회적으로 더 가치 있게 활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창업에 나섰다.

“일반 회사에서 일할 때 ‘내가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디자인으로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사회적기업이 그걸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 생각했죠.”

최혜진 공동대표는 소위 돈 버는 디자인 업무로 바쁜 일상에서도 지역 안내서, 문화유산, 자연물 등 우리 주변에서 잊혀 가는 것들을 담은 기록형 독립출판물을 매년 1-2종 발간한다. <마포이야기>에 이어 <양천이야기>도 발간 준비 중이다.

필사책 <읽다, 쓰다>

잊혀 가는 것들을 기록하는 글자와 기록사이의 지향점은 책과 연계한 문구·소품류 제작·판매사업인 ‘나눔굿-즈’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필사책 <읽다, 쓰다>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 총 69편을 수록해 잊혀져가던 근대문학을 환기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사책 속, 마음을 울리는 문구들은 독자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안겨준다.

“‘필사라는 말이 낯선 것이 된 지금, 다시 이 방법을 꺼내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어느새 우리에게서 멀어진 시를 읽는 법에 대해 생각

합니다. 시가 어렵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문자 그대로 가진 아름

다움을 즐기는 시간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필과 소설 속 아름다운 문

장을 한 자 한 자 옮겨가며 글 읽는 즐거움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읽다, 쓰다머리말 중에서

근대문학표지 노트&엽서 세트도 어린 시절 보던 문학책 표지를 문구류에 적용해 인기를 누렸다.

글자와기록사이에서 제작한 근대문학표지 노트&엽서 세트

나눔굿-즈 상품의 판매 수익금 중 50%는 취약계층에 기부한다. 그동안 학대아동을 위한 바자회, 미혼모 자립지원 문화프로그램,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정심여자직업학교 등에 기부해왔다.

글자와기록사이는 지역아동센터 아동들에게 꿈 디자인 진로교육을 제공해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물품 기부를 넘어 미술정서교육, 미술진로교육으로 기부 방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최 대표는 “그동안 진행해 온 나눔굿-즈 프로젝트가 판매수익금을 기부하는데 그쳤다면, 필사책 <읽다, 쓰다>는 취약계층이 문학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정서교육 기회를 제공했다”며 “더불어 양천구 지역아동센터 아동들에게는 꿈 디자인 진로교육 강사로 나섰는데, 미술과 디자인을 가미한 진로교육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회적경제를 돕는 디자인

글자와 기록사이는 자신들이 가진 디자인 역량을 사회적경제 영역을 돕는데도 적극 활용한다. 사회적경제 구성원들에게 무료 디자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d.상담소’가 대표적이다. 사회적기업가들은 자신이 기획한 아이디어를 글자와 기록사이와 함께 발전시키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시각적 콘셉트를 도출함으로써 프로젝트로 실현되는 이미지를 사전에 그려볼 수 있다.

최 공동대표는 공익 분야에서 디자인이 가진 힘은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업을 실험 중이다. 사물인터넷(IoT) 제품인 ‘반려동물 사료그릇’, 고독사를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스마트 약 보관함’,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의 작품을 함께 묶어 소개하는 아티스트 북페어 등이 바로 그런 실험들이다. 특히 자신들의 재능이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적극 활용되길 기대한다.

글자와기록사이가 개발한 ‘스마트 약 약 보관함’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연동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보통 사회적경제기업 제품 또는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디자인은 퀼리티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어요. 취약계층을 돕는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들의 활동이 더 돋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적재적소의 사업에 디자인이 반영되는 날을 꿈꾸는 글자와 기록사이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글. 라현윤 이로운넷 기자

사진제공. 글자와 기록사이,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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