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쳐든 책은 예상대로 어렵지 않았으므로 술술 읽혀졌다. 책 좀 읽던 어린 시절부터 읽기보다 쌓아놓거나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이즈음까지 변하지 않은, 작정하고 붙들면 놓지 않는 버릇 그대로 제법 두툼한 350쪽을 반나절쯤 들여 다 읽었다.

두 눈이 퀭하고 머릿속이 멍하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뭔가 뿌듯하고 개운할 때가 많은데 이상하다. 이런 일은 기억에 없다. 책을 다 읽었으니 생각한 대로 무엇인가를 써야 하는데, 써서 약속한 곳으로 보내야 하는데 자꾸 깊은 숲의 울음 같은 바람소리가 고막을 채우고 두 손을 붙들었다. 아, 빨리 써야 되는데….

출판사 ‘유리창’ 우일문 대표가 쓴 아버지의 생애사 ‘시시한 역사, 아버지’를 읽었다. 표지의 발문부터 서문, 본문 보물찾기하듯 무엇이라도 건져보려고 꼼꼼하게 훑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하고 싶었던 말은 발문과 서문에 다 뽑아놨더라. 허탈하다(이유가 있으나 밝히지 않겠다).

본문은 읽지 않아도 된다거나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의 청년기와 나의 청년기를 수시로 오가는 본문은 속도감도 있고 1950년대와 1980년대 청년의 성장소설 두 권을 비교해가며 읽는 것과 같은 재미도 쏠쏠하다. 

생애사(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라는 낱말도 생경한 이 책의 실마리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는 서문의 한 문장으로부터 풀려나가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풉, 웃었다.

그 이유는, 인민군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총 한번 만져보지 못한 상태로 미군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한국군 포로수용소로 넘겨져 지옥을 체험하고 평생 붉은 낙인을 떼어내지 못한 채 모든 꿈을 접고 농부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새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밝힌 고백에 있거니와 언젠가 인사동에서 만났던 우일문의 첫인상이 딱 그랬기 때문이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말을 빌리면 역사를 보는 ‘참신하고 탁월한 관점 설정’에 있다. 한 사람의 개인사로 역사를 관통한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는 많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950년대의 아버지와 1980년대의 나를 교차시켜 자연스럽게 각각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는 불통과 불화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 간의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시한 역사, 아버지’는 이전의 생애사나 역사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아버지는 국가의 조롱과 멸시에 모욕과 수치를 느꼈지만 평생 내색하지 않았다.” 표지에 실린 이 발문은 좌절과 울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화해의 웅변이다. 

평생을 불화해온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화해했다. 실은,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난 우리 맏상주 뜻대로 할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처럼, 오랫동안 내색하지 않았을 뿐 아버지는 늘 아들을 믿고 의지했었다. 불화는, 어린 시절의 상처로 어긋난 아들의 오해였고 그것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행장을 챙기면서 모두 풀렸다. 

누구라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 같다. ‘시시한 역사, 아버지’라는 제목은 지독한 반어법이다. 거기에는, ‘풍파무쌍’한 시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을 개돼지로 만들어버린 국가의 폭력에 대한 자학의 항변이 깃들어 있다.

역사의 진실에 관심이 많은 출판인답게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도 간간이 보여준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눈시울을 자극하는 최루제가 뿌려져 있는데 뜻밖에도 그것은 인민군의용군으로 끌려간 청년들을 끝까지 보호해준 인민군 소대장이나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사촌누나와 어머니, 남편 잃은 며느리를 위해 천륜을 끊어놓은 집안 어르신 같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태극기세대 어르신들과 촛불세대 젊은이들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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