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올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행한 국민독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성인 독서율은 59.9%로, 1994년 이래 가장 낮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매년 높아지지만 독서율은 점점 떨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꽂이에 도도하게 꽂혀만 있던 책을 해방시켜 책과 친해지는 다양한 방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선 책을 읽는 공간의 변화다. 조용하고 딱딱한 이미지의 도서관은 친근감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실내를 벗어나 야외에서 즐기는 책놀이 행사가 풍성해지고 있다. 14년 간 홍대거리에서 이어지고 있는 와우북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책의 쓰임도 읽는 것에서 보고 느끼는 놀이로 바뀌고 있다. 헌책을 업사이클하는 팝업북 프로젝트라든지, 책의 내용을 연극이나 뮤지컬로 선보이는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이처럼 사람들과 책 간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활동에 나서는 사회혁신기업들을 소개한다.

사회적기업 '이야기꾼의 책공연'은 책을 바탕으로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연을 제작해 선보인다.

“교훈적인 주제의 책은 무조건 피해요.”

책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만드는 사회적기업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황덕신, 김형아 공동대표는 책을 고르는 제1원칙이 ‘비교훈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들을 위한 연극에 교훈을 쏙 빼다니,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걸까? 답은 간단했다. 바로 ‘재미’와 ‘즐거움’이다.

이야기꾼의 책공연은 2008년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센터’의 사회적기업 인큐베이팅 사업을 통해 이듬해 설립돼 1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 어린이청소년극의 발전을 이끈 유홍영 극단사다리 예술감독이 창단멤버로 참여해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전문 예술 사업을 하는 단체로 발을 뗐다. 고용노동부 인증 사회적기업이 되면서 ‘책’을 소재로 택했고, 한 개의 이야기를 100가지 감동으로 풀어내는 공연 단체로 성장 중이다.

계몽적 도구→즐거운 놀이, 각자 원하는 만큼 보고 듣고 경험하게

연극 '낱말공장나라' 공연 장면. 작가 아네스 드 레스트라드의 동명 동화를 네모난 상자, 아카펠라 리듬 등을 통해 흥미롭게 전한다.

아이가 책을 읽는다고 하면 싫어할 어른이 없을 만큼, 그동안 책은 주로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도구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이야기꾼의 책공연은 특정한 주제를 어린이 관객 전체에게 뭉뚱그려 주입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이 자신이 느끼고 싶은 것을 각자 원하는 만큼 보고 듣고 경험하게 해줄 뿐이다.

예를 들어 연극 ‘낱말공장나라’는 돈을 주고 낱말을 삼켜야만 말을 할 수 있는 나라의 이야기를 그린다. 부자들은 낱말을 구입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낱말을 살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주인공 ‘필레아스’는 아무 뜻도 없는 싼 낱말을 사서 이상한 말을 내뱉는데, 상대방은 그것이 ‘좋아한다’는 뜻임을 이내 알아챈다. 이를 보는 아이들 역시 필레아스의 진심이 무엇인지 저절로 깨닫게 된다.  

황 대표는 “어린이들 모습이 전부 다르듯 생각도 제각각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은 관객 개별에게 열린 구조로 이야기를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서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 역시 “교통질서 배우기, 이 잘 닦기 등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연극도 필요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있다”며 “이야기꾼의 책공연은 예술로써 연극을 바라보고, 관객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덧붙였다.

마임, 춤, 퀴즈 등 작품마다 반드시 ‘놀이’의 요소를 넣어 아이들이 작품을 재밌게 즐기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따라서 해 보게끔 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황 대표는 “놀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혼자 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했을 때 더 재밌다. 부모님, 친구와 함께 공연 보는 것을 장려하는데, 공연이 놀이로 이어지게끔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의 힘은 듣는 과정에서…‘공감력’ ‘해독력’이 민주시민 만든다

연극 '마쯔와 신기한 돌' 공연 장면. 작가 마르쿠스 피스터의 동명 그림책을 바탕으로 움직임, 해설, 라이브 연주 등으로 구성했다.

책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기에 책 읽는 속도와 방식에도 질문을 던진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작품이 ‘마쯔와 신기한 돌’이다. 책 초반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넓고 넓은 바다’라는 단 한 구절이 연극에서는 무려 15분에 달하는 장면으로 재탄생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한 문장을 가지고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이 황 대표의 생각이다.

“어린이들의 독서를 들여다보면 그냥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생각과 지식을 재구성해요.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상상하고 구상하고 놀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이야기의 힘은 듣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요즘처럼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건 ‘공감력’과 ‘해독력’이거든요.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 민주사회라고 하면, 공감을 통해 갈등을 조절하는 능력이 바로 이야기를 통해 시작된다고 봐요.” (황 대표)

이야기꾼의 책공연에서 하는 주요 활동은 아동?청소년을 위한 공연과 연극 교육이다. 김 대표는 다른 공연 단체와의 차이점에 대해 “전국 어디든 원하는 곳에 찾아간다”는 점을 꼽았다. 불러주는 곳마다 극장의 크기와 특성이 제각각인 탓에 무대, 세트, 의상 등이 고정적이지 않다. 김 대표는 “투박한 세트와 검은색 의상, 피아노 한 대가 전부일 때도 있지만, 아이들이 이야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연평균 250회 공연, 100회 교육…“어린이 이해해야 좋은 작품 나와”

이야기꾼의 책공연 소속 배우들은 연 100회 이상 교육 워크숍을 통해 아이들을 만난다.

전국으로 공연을 다니다 보면, 수도권과 달리 지방 아이들은 ‘연극을 처음 본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주요 임무다. 황 대표는 “문화자본은 어릴 때 경험하지 않으면 어른이 돼서는 공짜로 준다 해도 찾지 않아 더욱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라며 “우리 작품의 목표 중 하나는 연극이 끝나도 아이들이 책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격차를 줄여가는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지난 10년간 1500회 넘는 공연 통해 15만 이상의 관객을 만났다. 연 평균 200~250회 공연을 소화하면서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교육 워크숍도 연 100회 이상 진행한다. 배우이자 교사인 2명의 강사가 15명 정도의 어린이들과 부딪히면서 책과 가까이 놀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김 대표는 “공연만큼 워크숍을 중시하는 이유는 아이들을 만나며 이해하는 과정이 무대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단체 활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현재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소속 배우 16명은 프리랜서가 아닌 전일 상근하는 급여제 방식으로 참여한다. ‘배우작업자’라 부르는 구성원들은 보통 1년에 4작품에 출연하고,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신작을 위한 공동 창작작업에 참여하는 등 1년 365일 늘 바쁘게 지낸다.

김형아(왼쪽), 황덕신 이야기꾼의 책공연 공동대표는 "작품의 연령을 다양화해서
아직 활발히 제작되지 않는 36개월 미만 영유아를 위한 연극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구성원들이 의견을 모아 책을 소재로 공동 개발한 대표 레퍼토리만 ‘별별왕’ ‘행복한 왕자’ ‘평강공주와 온달바보’ ‘청소부 토끼’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다가’ ‘마쯔와 신기한 돌’ ‘낱말공장나라’ 등 수십 편이다. 재미도 있고 예술성도 높아 서울어린이연극상, 아시테지축제, 김천국제가족연극제 등 국내 유수한 단체에서 수상한 이력도 많다.

이제 10살이 된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일까. 황 대표는 “공연시장에 캐릭터 쇼나 대형극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규모이지만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개발하고 선보이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시민들이 알아주시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김 대표 역시 “단체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꾸준히 작품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 좋은 책, 좋은 연극을 통해 더 많은 어린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제공. 이야기꾼의 책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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