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돌담길을 한참 따라 걷다 보면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을 따라 들어간 골목길 안,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이색적인 건물하나가 눈에 띈다. 1층은 한옥으로 2층과 3층은 현대 건물로 지어졌다. ‘뭐 하는 곳이지?’ 궁금하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한옥 문과 창문이 길가로 나있다. 바로 옆 목재로 만든 자그마한 문을 열면 지하를 가리키는 빨간 간판의 협동조합 ‘누군가의 집’ 팻말을 그제야 만날 수 있다.
 

야생다큐멘터리 제작자 최기순 감독의 강연

지난 7일 저녁에 방문한 누군가의 집은 야생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최기순 감독의 강연을 들으러 온 참석자들로 가득했다. 꽁지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외모에서 야생의 거침을 풍기는 최 감독은 호랑이, 표범, 곰과 같은 맹수를 전문적으로 촬영했다. 그는 이날 직접 촬영한 다양한 맹수들의 사진과 영상을 소개하면서 “호랑이가 사는 숲을 들어가 걷는 것이 뉴욕 시내를 걷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설명한다. 맹수가 가진 사납다는 이미지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것.

이날 강연을 들은 박진영(26) 참석자는 “멸종위기에 처한 표범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어미와 근친상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웠다”며 “현재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고 있는데 시청자들에게 이런 상황을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강연은 카페에 편히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연자와 참석자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누군가의 집은 낮에는 카페이자 서점이고, 밤에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간을 대여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누구나 편하게 들러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책을 볼 수도 있는 ‘쉼과 여백’의 공간을 추구한다. 전시나 강연 등 문화행사를 열어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친밀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며, 예술상품이나 주요 서적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판매 공간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집 협동조합 골방 이용법
제공=누군가의집?

‘차와 커피는 무한리필이고 나갈 때 딱 5000원만 내세요.’

입구에 붙어있는 이용법이다. 대관을 원하는 경우에는 별도로 상의해야 하고 노트북을 지참하면 빔프로젝터 사용이 가능하다.

누군가의 집은 조합원의 3층 규모의 가정집 중 일부를 기증받아 만든 12평 남짓의 아주 작은 지하 골방이다. 잡동사니를 두던 허름한 지하 창고를 지금의 ‘누군가의 집’으로 바꾼 이들은 화가, 출판인, 전문번역가, 기업경영자, 전 농장 대표, 그래픽 디자이너인 7명의 조합원이다.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조합원들은 여행을 통해 만났어요. 자본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모임을 만들고 싶어 협동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박정은 조합 이사장이 말하는 시작이다.

“올해 6월 초에 문을 열고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준비 기간은 훨씬 오래됐습니다. 조합을 시작하기 전 6개여 월 동안 매주 1~2회 조합원들이 만나서 토론하고 다른 책방이나 카페를 견학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사전 준비가 철저해서인지 개관 출범 3개월인데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협동조합 출범 후 총 두 번의 미술품 전시와 열 번의 외부 강사 강연, 다섯 번의 정기 강좌가 있었다. 화가 이소의 <화가가 사랑한 파리 미술관>, 오페라코치 신영주의 <북촌 카메라따>, 사진작가 고영희의 <아프리카의 색깔>, 미술사학자 강우방의 <민화 다시 읽기> 등의 강연은 만석이었다. ‘무법적 정의’의 저자로 알려진 세계적인 석학 테드 제닝스 교수를 초빙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다양한 주제로 열리는 문화강좌는 1만~2만원의 참가비를 내면 음료와 간단한 먹거리가 함께 제공된다. ‘협동조합 누군가의 집’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를 등록하거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조합원들이 직접 작성하고 디자인한 소식지를 확인할 수 있다.

대화 도중 누군가의 집에 걸려있는 그림들과 책 그리고 예술품들이 눈에 띄었다. 작지만 아름답고, 소박한 느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의집 협동조합 내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조합원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경험과 재능을 바탕으로 누군가의 집을 꾸몄습니다. 그림들은 이소(화가), 김병철(화가) 조합원들이 직접 그려주었어요. 책장 속은 기증받은 책들과 조합원들이 추천하고 싶은 책들로 채웠습니다. 백선희(불어 번역가) 조합원이 번역한 책들도 함께 있습니다.” 

박 이사장은 조합원들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린 듯한 인쇄물을 내밀었다.

“제가 직접 걸어 다니며 그린 지도인데요. 누군가의 집은 예쁜 카페와 공방들이 주목받는 골목에 있습니다.” 

지도에는 카페와 공방, 관광객이 많이 찾는 북촌한옥마을이 표시돼 있다. 누군가의 집을 나선 뒤에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친절히 담겼다.

“조합원들 간 사소한 견해차로 어려울 때, 일의 속도가 느려지더라고 치열한 대화로 풀어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덕분에 강연을 듣기 위해 열한 살의 초등학생 소년부터 여든을 넘긴 할머니,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 오는 등 사람 냄새나는 공간이 되었다”고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지자체나 지역 단체와 협업해 골목 축제나 전시회 열기’. 박 이사장이 말하는 누군가의 집의 가까운 문밖 미래다.

 

사진. 박종규 청년기자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