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리라이팅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을 낸 저자 김연숙(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조교수/문학박사)

# "토지는 참 독한 소설이다. 26년간 어떻게 이렇게 쓰냐 했는데, 그런 독한 소설 가지고 온 교수님도 독하고, 그걸 가지고 숙제 한 우리도 독하다."

김연숙 작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조교수/문학박사)가 토지를 ‘'리라이팅'(재해석해 다시 쓰는 장르. 주로 외국 고전근대문학에서 활발하게 이뤄짐)한 책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을 출간한다고 포털에 포스트를 올리자 토지 강의를 들은 한 학생이 쓴 댓글이었다고 한다.

"한참 웃었어요. 강의 신청을 잘못해서 들어왔다가 억지로 공부하고 빡세게 읽었다며, 그때의 나를 칭찬한다, 그걸 다 읽다니 나를 폭풍 칭찬한다는 내용도 있더라고요. 지독한 토지를 다 읽었으니 스스로가 대견해할만 하죠."

쉽게 수긍 갔다. 여고시절, 토지가 완결되기 전 도전했으나 2부에서인가 결국 접어버린 채 나이 50을 맞는 주제니.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접하며 마치 토지를 읽은 듯, 가끔 뻔뻔한 착각까지 하는 상황인지라 한 학기 토지를 함께 읽은 젊은 청년들이 500명 가까이 된다는 소식에 괜히 주눅마저 든다. 요즘 청년들도 읽는다지 않는가.

지난 22일 오후 서촌의 한 한옥. 저자를 만나자마자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토지도 읽지 않고, 리라이팅한 책을 읽고 저자를 인터뷰하러 왔습니다." 작가는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걱정 마세요. 토지 학회가 있어요. 완독하지 않는 사람들도 회원이 될 수 있는 걸요."

토지를 읽지 않은 기자는, 30년 전에 포기한 토지를 해석한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을 겸손한 자세로 따라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 제목부터가 만만치 않아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토지 인용문구인가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천년의 상상)

아니에요. 출판사 편집자가 정한 건데 저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 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비록 주인공은 아니나 그저 시대의 배경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각자의 삶을 산 사람들이라는 거죠. 쓸모 있다 없다를 쉽게 규정하는데, 그들 모두 길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길을 찾고 삶의 의미를 찾은, 다 제 몫을 해낸 사람들이니까.

- 토지 등장인물이 총 600명이라고요. 제목 의미도 그렇고, 책에서 주인공 서희와 길상을 너무 '대충' 다룬 거 같아요.

(웃음) 예. 연구자에 따라 700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토지 인물사전'이 있을 정도인걸요. 의도적으로 주인공들을 배제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내고 나서 보니 의도적으로 서희와 길상 이야기를 안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20대 여학생들은 서희를 좋아합니다. 당차게 살고 싶다고, 여성 롤 모델을 잡으라면 빠지지 않고 톱3에 들 정도에요. 그럼에도 서희 이야기는 제 마음을 끌어당기지 않았어요. 선 굵고, 서희가 토지의 배경 전체를 전부 다 이끌어가는 것도 맞고, 어쩌면 서희가 토지라고 할 정도로 큰 인물인데. 저는 작은 사람들의 세세한 이야기가 살아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길상은 너무 무거워요. 박경리 선생님 (생전에) 어떤 대담을 본 적 있는데, 굉장히 공 들인 인물이 길상인데, 당신이 쓰고 나서 너무 무거워졌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힘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이 인물 통해서 뭔가를 드러내려고 하면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서 그런건지 아쉽다고. 저도 길상이 나오면 너무 무겁고 힘들더라고요. 물론 (길상은)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았죠. 어쨌든 토지 안에 등장하는 나머지 사람을 더 보겠다는 무의식이 그렇게 시켰던 것 같아요.

작가는 원작자도 그런 마음으로 썼을 거라고 본다. 예를 들면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 결혼을 하는데 그 긴 소설 속에 이들이 결혼하는 장면이 안 나온다는 거다. "기 막힐 노릇 아닌가요? 이용의 아들 홍이가 결혼하는 장면은 장작 3페이지에 걸쳐 나와요. 신랑이 말을 타고 어떻게 가고 그날 비가 내려서 어떻게 됐고 신부가 첫날밤 어떻게 됐고. 그런데 서희의 결혼 장면은 하나도 안 나오니."

- 책은 인간, 계급, 가족, 돈, 사랑, 욕망...9가지 키워드로 토지를 재구성합니다. 이 키워드는 2018년 현재 사회에서도 유효한 단어들이더라고요. 가장 공들인 키워드가 있다면요.

가장 집중했던 건 7장 부끄러움’입니다. 토지를 읽고 '정말 사람이 사는 게 이런 거 아닐까' 그런 울컥함이 있었어요. 토지 속 인물들은 사소하게 살아가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가는 게 아니라, 정성들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9장 '국가' 키워드도 중요했어요. 공동체, 내가 살아가는 관계를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부끄러움도 타자와 관계에서 이야기되는 부분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게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연대 속에 살아가야 한다면, 공동체 사회를 빠트릴 수 없죠. 그런 점을 국가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김연숙 교수는 "사소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정성들여 사는 토지 속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라며
"특히 토지에서 부끄러움을 중요한 테마로 본다"고 밝혔다.

- 토지는 작가도 주인공도 여성입니다. 키워드에 ‘여성이 없어서 다소 갸웃했어요.

네. 어찌 하다 보니 키워드에서 밀렸다고 봐야하는데. 1930년대 들어서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나왔죠. 토지에선 부정적인 현상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교육을 받은 여학교 교사라든가 잡지 만드는 사람이라든가, 봉순이 딸(서희의 양녀)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부분들을 충분히 의미있죠. 여성도 그렇고, 미처 다 못 다룬 키워드가 정말 많아요. 지금 제가 쓰는 논문 주제가 ‘토지 속의 환대’인데 어떻게 이방인을 맞이하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학자들은 토지에서 평사리 주막이라는 공간을 많이 분석합니다. 주막은 나그네가 왔다갔다하는 곳입니다. 소수자 문제도 있고. 마을 공동체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람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윤리로 관계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요. 간도에서도 여관이 나오는데 조선인이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중국 사람들, 조선인, 일본인 등 관계에서 어떻게 이방인을 다루는가를 알 수 있죠. 그런 걸 보면 아주 시의 적절하게 딱 엮어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문제와도 이어진다고 봅니다. 다민족, 난민,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놓친 또 하나의 키워드로 1930~1940년 시대를 얘기하던 중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작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김은숙 작가가 토지를 오마주(hommage)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주인공도 서희와 캐릭터가 굉장히 많이 겹칩니다. '누구의 나라냐, 애기씨가 생각하는 나라? 백정, 노비 살 수 있냐?' 그 대사는 토지에서 관수, 월선이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독립은 양반이나 하는 것’이 아니냐고'. 또, 인력거꾼이 '호텔 앞에서 나라가 망하든 어쩌든 일단 일본 사람들이 빈관(호텔)을 많이 찾아오니까 돈 벌어서 좋다'는 대사도 나오죠? 그 장면은 간도에서 거간하는 공노인이 아랫사람들한테 '조선인들끼리 거래해야지, 달다고 지금 꿀떡 꿀떡 거래하면 어떡하느냐'고 소리 지르는데, 사람들이 '지금 당장 뭐가 있어야 한다'고 맞서는 부분하고 겹치더라고요. 정말 딱 비슷한 주제가 드라마에 읽히니 분명 오마주한거라고 몇 번을 생각했어요. 공부를 위해 드라마 본다는 핑계 대며 얼마나 열심히 시청하는지.(웃음)"

- 해방 후 토지 속 등장인물들의 후손이 어떻게 살지 상상해봤나요. 해방에서 소설이 끝나는데, 만약 계속 됐다면 어떻게 그려졌을까요.

아주 슬펐을 거 같습니다. 강포수가 귀녀의 아들(강두메)을 간도에 데려가 키웠는데, 굉장히 똑똑해서 공산당 학교에 들어가 항일운동까지 합니다. 소설이 해방되고 나서 끝났으니 망정이지 그 다음에 두메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불손한 소리지만, 박 선생님이 소설을 해방 날 끝낸 게 잘한 건지도 모르겠다, 계속 갔으면 그 이후에는 더 슬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강의까지 하려면 20권 토지 완독을 몇 번 했을 거 같은데요. 25세에 논문을 쓰려 토지를 택했다가 ‘엎었다면서요. 

25살에 논문 주제로 토지를 잡고 읽기 시작했어요. 그땐 16권 짜리였는데 다 읽었지만 논문은 포기했습니다. 그때는 여성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페미니즘 이론이 영미문학을 통해 들어온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그쪽을 연구하고 싶었죠. 그래서 큰 여성작가를 선정해 논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읽고도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박웅현 작가가 토지를 넉달 만에 읽었다며 마치 한 첩의 보약을 먹은 심정, 온 몸이 충만해지는 느낌이라고 책에 쓴 적 있어요. 어휴...제겐 어려운 일입니다. 강의 맡은 후에는 매 학기 강의를 위해 계속 읽으니 네다섯번은 읽었죠. 놀라운 건, 자료 정리를 꽤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권호 확인하려고 펴보다가 '여기에 이런 장면 있었나' 놀라곤 합니다. 아직도 토지 전체 이야기를 꿰는 건 힘들지 않나 할 정도에요.

- 경희대에서 토지 강의를 8학기 했다면, 평균 50명 정도, 400~500명 정도 대학생이 토지를 읽었다는 건데, 어려워하지 않나요.

한 학기 안에 절대 끝낼 수는 없는 분량인데도 토지를 완독한 학생들이 있어요. '독립연구'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학생 2명 이상 신청하면 가능해요. 4~5명이 모여 강의 주제 만들어 교수를 섭외해 세미나로 진행하는 소규모 강의죠. 토지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독립연구를 신청했어요. 그렇게 2팀은 완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완독하기도 하고, 남은 부분은 또 남겨두기도 하고, 다 읽는 게 의무는 아니니까. 특정 인물에 대해 죽어도 이해 못한다, 나라도 그랬을 거 같다는 말을 또래끼리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김 작가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2012년 9월 2학기 강의를 맡긴 했는데 깝깝했다는 것. 마침 앞서 8월에 연세대를 중심으로 설립한 토지 학회가 큰 도움이 됐단다. "하하하, 당장 달려갔죠. 다 읽지 않아도, 전문 연구자가 아니어도 회원 가입이 가능하다는 열린 정책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 토지를 실용서로 정의했습니다. 

문학이라는 게 그냥 읽고 나서 '재밌다, 시간 잘 보냈다, 소일거리 했다'가 아니라 그런 책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데 뭔가 힘이 되고, 그것들이 때때로 삶에 힘이되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책상 정리 잘 하는 법, 메모 잘하는 법만 실용서가 아니라, 어떨 땐 소설 속 누구처럼 이렇게 해야 해, 누구구는 이렇게 했지 떠올린다면 그것 역시 실용서 아닐까요? 토지는 더욱, 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희는 어떻게 할까. 그게 실용서고 문학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야하는 역할이기도 하구요. 

김연숙 교수는 "문학 소설도 실용서가 될 수 있다"며 "국내 문학 작품이 더 활발히 리라이팅되기를 바랐다.

작가는 인터뷰 말미 '리라이팅 토지' 의미를 다시 강조했다. "새로운 해석이나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게 리라이팅인데 국내에서 우리 근대작품을 리라이팅한 경우는 고미숙 선생의 임꺽정('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정도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외국에서 리라이팅은 하나의 장르죠. 국내에서 카프카, 칸트 등 서양 작가 작품을 리라이팅하는 경우는 그나마 활발합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토지를 읽겠다고 하는 반응이 제일 좋지만, 다른 사람은 토지를 이렇게 읽었구나 생각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염상섭은 학생들이 시험으로만 생각하고 굉장히 싫어하는 작가인데 의외로 청년 인물에 자기들을 투사하더라고요, 지금의 눈으로 새롭게 보고 지금의 목소리 넣는 게 중요한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야 문학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지 중 애정 가는 인물 하나를 꼽아달라는 요구에 작가는 선뜻 답하지 않는다. "특별히 없어요. 다만, 이날은 어떤 인물, 다른 날은 또 저 인물이 들쑥날쑥 생각나죠. 오늘 여기(한옥) 와서는 서희가 간도 가서 산 집이 반듯반듯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고지 4만여 장에 담긴 토지의 600여명의 인물이, 장면이 일상에서 툭툭 떠오른다니 토지는 김 교수에게 애정하는 문학이자 '쓸모 있는 실용서'임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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